초등학교 시절,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도움을 준다는 말을 누누히 강조하시던 선생님말씀과 함께 우리들의 손에 급식처럼 쥐어주는 '빵' 이며 '우유분말'은 하루의 일용할 양식으로 굳어졌다. 그 귀한 빵을 먹지않고 군침을 꼴까닥 넘겨가며 집으로 가져온건 순전히 <혜정>이에게 주기위해서였다. 집에 도착한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키며 탈진까지 했었으니... 몇번의 굴곡진 삶이 끝을 알수 없어하던 큰 오빠내외는 피폐해진 심적 페닉현상을 보이며 부산으로 이사한다는 말을 들었던 때는 아마 1975년도 무렵이었지싶다. 밀양에서 알고 지내던 어느분의 어드바이스로 조그마한 가게로 시작한 큰 오빠네는 운이 따랐던지 승승장구 했다.
그런 몇년 후 늦은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던 어느날 친정모친의 갑작스런 뇌일혈로 큰오빠네 집에서 기거를 시작하였다. 내겐 둘도 없는 조카인 <혜정>이와 가깝게 지내던 나는 <혜정>이의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보면서부터 가끔 대립을 벌이곤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학교에서 숙제가 나오면 자신은 공부를 핑계삼아 고모인 내게 떠맡겨지곤 했기때문이다. 내게 할당된 일들은 뜨개질부터 시작해 본인이 하지 않으면 <혜정>이의 교복을 빠는 일과 노트에 숙제하는것까지 아주 다양했다. 이해를 못한건 아니였지만 하늘같은 고모를 우습게 안다는데 대해서 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절도 잠시....막내오빠의 아내로 맞아들인 막내올케와 신사도 협정으로 맺어진 우리들은 삼총사에 '달타냥'을 연상케할만큼 종횡무진 추억거리들을 많이 만들었다. 여름밤이면 드넓은 옥상은 더없는 훌륭한 휴식처를 제공했었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없었다.
그런 1982년도 가을날의 에메랄드빛 하늘이 더없는 푸르름을 덧칠하던 어느날 月下老人을 자처한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의 남자를 소개받게되면서 조카와의 긴 여정의 행로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말았다. 하루걸러 들러던 조카가 어느날 고모네집에 올때마다 예전같지 않고 부담스럽다는것과 몇번을 생각해본다음에 찾아온다는 말을 조카로부터 들었을 때 알싸한 마음이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모네집에 온다는걸 부담스러워한다는건 고모인 나자신을 괴롭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열흘에 한번씩 보름에 한번씩 우리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혜정>이와 내가 결혼하기전에 진하게 교유했던 사랑은 식어갔는지 모르겠다. 1995년 무렵이었던가...재래시장에서 친목을 도모하자는 뜻에서 결성한 <시장상우회> 라는 모임이 있다.
매달 마지막 넷째주 월요일에 모임을 갖고 일년에 한번이나 두 번쯤 봄,가을에 야유회를 가곤한다. 계원들의 회비로 모여지는 공금의 액수가 많지 않으면 가을야유회 한번으로만 단축시키고만다. 가을 야유회를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게문을 닫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조카에게 하루동안 가게를 봐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유난히 경쟁이 심한편이다. IMF 외환위기전만 하더라도 담합이 잘 되어서 한달에 두 번정도 둘째 일요일과 네쨋주 일요일에는 쉬는날을 고수하고 있었다. IMF외환위기를 겪고 난후 하루로 줄어 드는가 싶드니 급기야는 쉬는날이 없어지고 말았다. 동종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쉬는날이 없어져버려 가게문을 닫기를 부담스러워하던 나는 조카에게 가게를 봐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꼭 판매를 하라기보다 가게가 쉬지 않고 있다는 믿음을 고객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상위개념으로 작용했다.(지금 생각해보면 내 이기심에 출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 일 이후로 아직 조카의 모습을 한번도 못보고 있다. 해마다 두 번은 친정에 가는데, 친정아버지의 기일때와 친정어머니의 기일이다. 1989년도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제사때나 겨우 친정에 걸음을 하지만,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가지 않는다. 대신 잉여시간이 많은 친정 큰올케가 가게에 들리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친정부친의 기일이 4월23일(음력)이고 딱 한달지나 친정모친의 기일인 5월 23일에 가니 일년에 딱 두 번은 가는 셈이다.
친정에 가면 부엌옆으로 나란히 있는 조카의 침대위 머리맡에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가 담겨있는 재털이가 보였고, 침대밑으로는 다 마신 맥주의 빈캔이 쓰레기통에서 나를 대신해 반겨주었고, 큰방에 들리면 그리다 만 그림이 이젤 위 캔버스에 나를 내려다 보곤 한다. 언제부턴가 이젤 위 캔버스는 하얗게 여백을 드러내며 비어 있는건 같드니 인제 이젤마저 보이지 않는다. <혜정>이는 그렇게 누에번데기처럼 작은 집을 지어놓고 자신을 옭아메고 있는 듯했고, 단단한 껍질속으로 자신을 퇴각한 체 유리되어 있었다. 게으르기만 한 자신을 엄마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다른 누나들처럼 직장이 없고 엄마 능력에 빌붙어 산다는 이유로 동생들까지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잠시 은행일을 보긴 했지만, 이미 편함에 길들여진 조카에겐 엄층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든 듯 직장을 다닌지 몇달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혜정>이에게 좀 더 투자를 했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지만 번번히 큰올케로부터 질타를 받았다.<혜정>이가 고모인 내게 더 가까움을 느끼고 고민을 털어놓게 되고 엄마에겐 자신의 감정을 숨기곤 하던 <혜정>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아는 나는 조카의 카운셀러를 자청하곤 했었던게 큰올케한테는 못마땅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 고모, <혜정>이를 책임질수 없으면 내가하는데로 맡겨둬, <혜정>이한테 괜한 소리 해가지고 마음 들뜨게 하지말구..." 조카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으로 큰올케 속을 무던히도 썩혔는지 모른다. 올케생각에는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시켜버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자신의 뜻에 따라주지 않고 속을 태우는 딸이 내심 미웠을 것이다. 그런 어느날 조카인 <혜정>이가 투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던건 늦은 점심시간이었을 때 언니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고부터였다. 우리가게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병원에 조카가 입원했다는 전갈이었다. 가까이 있는 작은고모인 나보다 큰 고모인 언니를 먼저 찾았다는 사실과 먼거리를 돌아 언니가 내게 조카의 투신을 전화로 알려준데 대해 서운한 마음이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조카에게 소홀했다는 자책이 더 큰무게로 다가왔다. 서운한 이유의 밑바탕에는 <혜정>이와 그동안 나누었던 깊은 교감의 기억들이 뇌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혜정>이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내달렸다. 병상위 하얀시트에 누워있는 조카는 나의 방문에 엷은 미소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노랗게 변해있는 조카의 손을 갖다대면서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동안 조카의 마음고생이 어느정도 였는지 투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그일 이후로 또 한번의 투신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크다란 파문을 일으키던 조카의 모습은 몇번의 입원과 퇴원 이후로 두 번 다시 볼수가 없다. 큰올케에게 물어보아도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서너번 아니 몇번을 물어보았는지 모른다. 모진 세월을 살다보면 여우의 교활함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말을 있듯이 나 역시 정해진 답을 들을것이 분명하기에 두 번다시 <혜정>이의 묘연해진 행방을 묻지 않는다.
오늘같이 이렇게 하늘이 울음을 터 뜨리는 날이면 또 다시 조카의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같은 하늘아래 살아는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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