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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정순이 2006. 1. 22. 10:33

 

얼마 전 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어떤 인물인가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백분토론’에서 몇 번 보았던 가벼운 행동으로 인해 좋은 점수를 주지 못했었다. 그런 그가 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리에 우선 노무현대통령의 코드정치화가 빚은 설익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지울수가 없었다. 어느 정치인이 그랬다든가. “똑똑하지만, 너무 촐삭된다.‘ 그 정치인의 생각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유려한 문체나 박식함에  다시보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마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이 대통령과 경도된 코드를 맞춘다는 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 를 통해 유시민이라는 인물을 대입시켜보면서 그런 생각은 지울수가 없었다.

1. 드레퓌쉬사건


1894년 9월 어느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이었으며 발신인은 익명이었고,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는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평범한 유태인 장교인 '드레퓌스'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이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12월: 군사법정의 비밀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를 받음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후: 참모본부 정보국의 삐까르 중령이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에서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떼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 그후 재심요구파, 재심반대파로 갈라짐

1897년 1월 13일: 애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이로인해 진실의 궁극적 승리를 장담

1898년 8월 30일, 삐까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자살

그후 에스떼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은 이중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내용의 책을 출판함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받음

1904년 7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


2. 사라예보 사건


1차세계대전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길 총을 맞고 즉사했고 범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범인은 세르비아 청년으로 그는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이다. 이를 세칭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에서 패배한후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로부터 지배를받고 1908년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당했다 이 사건 이후 1914년 7월 23일 오후 6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 내의 반 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오스트라아 단체의 해산 해산,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기 위한 협의회와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 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 등 세르비아의 민족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세르비아는 그중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을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1914년 8월28일: 오스트라아, 세르비아에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8월1일: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8월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

8월2일: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8월4일: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11월: 오스만 투르크 독일, 오스트리아에 가담, 아라비아 추축군에 선전포고

그후....:불가리아 독일편에 가담, 그리스 연합군에 가담


3. 대공황


세계경제공황은 1929년 10월에 미국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되어, 곧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자국의 농산물과 전쟁에 필요한 무기, 군수품 등의 공업생산물들을 1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유럽의 각국에 판매하면서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즉, 전쟁상황이 미국의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가져온 것이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 뒤인 1929년까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경제는 거품에 불과했다.

1919년 갑작스런 종전은 미국의 과잉생산물의 판매시장의 급작스런 차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전후 약 10년간은 잉여생산물을 전후 유럽국가들에게 원조하는 형식으로 소모하면서 경제체제를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원조정책은 유효하여 1925년 경에는 유럽 각국들도 전후복구를 마치고 전쟁 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나라들도 이제는 자급자족할 만큼 농산물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공장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이제는 세계의 상품시장과 자본의 투자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 각국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 여파는 미국의 생산력과 구매력의 불균형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생산력의 증대와 구매력의 불균형이 경제공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0월 24일: 이른바 '마의 목요일'에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에서는 주가의 폭락현상이 나타남


10월 29일: 주가 하락에 당황한 주주들은 기록적인 숫자인 1641만 30주를 매각

1931년에서 1933년: 공황은 전세계로 파급

1933년: 런던에서 세계경제회의를 개최하여 공동으로 난국의 타개책을 논의했으나 실패

1930년: 대기세가 꺾이고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군수 문자 생산이 늘어나면서 끝


4.아돌프 히틀러

아돌르 히틀러(Adolf Hitler)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산간지방에서 사생아로 내어나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세관관이였던 알로이스는 두 번이나 아내와 사별한 후 스물네 살이나 어린 클라라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아돌프히틀러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돌프는 공부를 썩 잘했으며 그림도 제법 잘 그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요구에 밀려 린츠의 실업학교로 진학한 뒤로는 학업성적과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4년만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빈에서 본 것은 "어둡고 가난하며 추잡한"한 하층민들의 세계였다. 그리고 이같은 경험 가운데서 그 유명한 '대중조작' 기술의 기초를 터득하게 되었다. 아돌프는 1913년 5월, 오스트리아의 당국의 징병검사를 피해 동경해 왔던 독일제국 뮌헨으로 도망쳤다. 뮌헨에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이 전쟁과 더불어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그는 별볼일 없는 그림을 팔아 살아가는 따분한 생활에서 탈출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독일제국의 병사가 된 것이다. 1918년 11월, 패전과 더불어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정은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의 교리'를 등졌다. 1914년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제국주의 강도전쟁 반대' 라는 제 2의 인터내셔널의 결의를 버리고, '조국수호전쟁'으로 달려갔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독일제국의 옛 지배세력과 타협했다. 1919년 1월에 결성된 '독일노동자당'. 이단체는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반대파는 이 당명의 앞부분 즉 '국가사회주의'를 가리키는 National-sozialist)의 앞뒤에서 Na 와 Zi를 따서 Nazi(나치)라고 했다. 이 정당은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평소 뛰어난 웅변술을 인정받고 있던 히틀러 상등병은 여기에 파견되어 금방 이름난 연사가 되었다. 그는 나치당의 정치집회에 야유를 퍼붓는 반대자들을 몰아내고 테러조직인 돌격대(SA)를 만들었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의 절반인 572만 명이 나치에게 학살당했고, 강제노동수용소 생존자들의 생체실험 등으로 죽음을 당한 유태인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견디는가? 영하 몇 도에서 인간은 죽는가? 이런저런 병균에 감염되면 어떤증세가 일어나는가? 이런 것이 실험의 주체였다. 나치는 그해 8월, 소려노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말자 9월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참을 수 없게 된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두 번째 세계전쟁이 타졌다. 독일, 일번, 이탈리아의 파시즘 진영과 영국. 미국. 소련. 프랑스 등의 반 파시스트 연합국 진영 사이의 일대결전이 5대양 6대주에서 불을 뿜었다. 초기에 승승장구 하던 독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육. 해. 공군 모두 열세에 빠졌으며, 1945년 5월7일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범죄자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 왔던 에바 브라운과 4월29일 새벽에 황급히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날 오후 동반자살로 생을 마쳤다.

 


5.말콤 엑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결국 목숨까지 잃은 행동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말콤 엑스는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 속에서 보스턴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감옥에서 만난 흑인 회교 경건주의자 베인스의 소개로 당시 흑인들의 희망처럼 떠오르고 있던 이슬람교의 한 지파의 교주인 엘리야 무하마드를 알게 되어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슬람교에 귀의한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말콤 엑스는 엘리야 무하마드 추종 세력의 끊임없는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이슬람교의 근본 교리와 백인들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마침내 엘리야 무하마드의 행동 대원들인 암살자 벤자민과 윌리엄 X가 말콤의 가슴에 기관총을 발사한다.


6.일본의 역사 왜곡


대부분의 우리들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경험에서 생긴 일본에 대한 반감을 아직도 의식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 생각해 본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시대 36년 동안 일본인들은 우리의 역사서를 불태우는등 역사왜곡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문제화 되고 있다. 교과서 왜곡 문제는 이미 1982년과 1986년에 한바탕 소란을 떨었음에도 이번에 재연 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정부의 근본적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냄비'로 비유되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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