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게나마 종교를 가진다면 하얀 미사보를 머리에 두르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형상 아래서 미사를 드리는 성당엘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서만일뿐 행동으로 옮기는데는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차일 피일 미루다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지천명의 발치쯤에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남편의 뜻이 그랬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올케의 강압적인 권유로 교리를 배우며 예비신자의 여정을 소화해내기 위해 휴일에는 분초를 다툴만큼 분주하게 움직여야한다. 올케의 강압에 의해 성당엘 발을 들여놓긴했지만, 교리커리큘럼이 다 옳지는 않을 것이라며 믿음에 의구심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는 생각이 들불처럼 일어나면 성당엘 다니질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마음 한귀퉁이에 똬리를 틀고 있기도하다.
몇 년 전 옆블럭에 살고 있는 지인이 먼저 성당엘 가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성당엘 다녔다는 이유와 나 역시 성당엘 다니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지인은 끈질기게 성당엘 같이 다니자며 채근을 했었다. 지인을 통해 성당엘 발을 들여놨다가 성당엘 다니지 않게되면 지인만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미루어짐작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 지난 5월의 어느날 가게로 찾아온 올케는 하얀 백지로 된 A4 용지를 내밀며 "여기다 남편 이름과 세례명, 아들 이름도 적고 생년월일도 적어요. 그리고 본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도 적구요." 생각할 겨를과 이것저것 물어볼 여지도 없이 올케는 미간을 일그려뜨려가며 강압적이였다.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마냥 올케가 요구하는데로 모든걸 적은 다음 올케에게 내밀었고 6월 12일 예비신자를 위한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서 나의 햇병아리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제도권에 속하면 여러 단체활동에 호응해야한다는 부담감 내지는 무게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가게를 하면서 자투리 시간이라도 낼 수 있으려나는 중압감...그러다 예비신자 모집기간에 성당엘 갔을 때는 낯이 익은 많은 사람들이 반색을 했다. 반색의 반대급부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성당엘 다니다 냉담하게되면 나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지않을까는 생뚱한 걱정이 또 한켠에 자리잡고 긴 기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동기부여인 셈이다. 하는일이 있으니, 늘 시간에 좇기듯 빠듯하다. 해서, 휴일에는 6시30분에 새벽미사를 보고, 9시가 되면 교리를 배우기 위해 바지런을 떨어야한다. 그러니 남들이 쉬는 휴일이라도 내게는 평일보다 더 바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종종걸음을 지쳐야한다.
돌아가신 시아버님 제일(祭日)때나 명절에는 늘 기도문으로 진행되곤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에는 가지 않을려는 남편은 아이러니컬했다. 하지만, 남편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가톨릭을 떠난 다른 종교는 자리하고 있질않다. 성당엘 다니질 않고 냉담하면서도 가톨릭의식으로 제례를 지내는건 가식적이라며 행사때는 참석하지 않는 셋째 시숙님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성당에 다니는건 성가시다는 생각을 갖는 듯 다니질 않았다. 아마 그 마음의 심연에는 군대에 입대하면서 다니지 않고부터 하느님의 뜻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자리한 듯했다. 그렇지만, 본인은 성당엘 다니진 않으면서도 가족들은 다른 종교를 가까이 하는건 극도로 경계를 했고 싫다는 감정을 완곡하게 표출하곤 했었다. 한 가정에 두개의 종교를 가진다는건 자신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듯한 굳은 신념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남편은 모태신앙인이었다. 다섯 살 무렵 간결핵으로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었고, 생명을 위협받던 남편은 어머니 등에 업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메리놀 병원>이었다. 당시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여있던 우리나라로서는 치료약의 한계가 있었던지, 몇 년간 치료를 받았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여러병원을 전전한 끝에 가게 된 메리놀 병원! 메리놀 병원에서의 치료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고, 완치라는 의사선생님의 검진결과가 나왔었고, 종래(從來)에는 간에 대한 항체가 생겨 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이한 생각으로 방심하다가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悲運)을 맞고 말았다. 지인의 추천에 혼자 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남편이 성당엘 다니면 같이 다닐 용의는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생전에 두어 번 성당에 가자는 나의 제안에 자신은 갈 마음이 없는듯, 나 혼자라도 성당에 다니길 원했었다. 신앙심이 생기지 않을 듯하다는 나의 핑계에 구호를 외치 듯 주먹을 쥔 손을 들며 "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다녀바바. 그럼 마음이 좀 달라지고 믿음이 생길 꺼야" 라는 어드바이스로 성당엘 다녀보라고 권했었는데...그때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다가, 정작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 성당엘 다니게 된 셈이다.
철제 대문을 통해 성당마당에 들어서면 마리아상이 반긴다. 교리선생님 교리에 따라 가볍게 목례를 한다. 대리석 계단을 돌아 2층으로 올라가면 예수님의 대리석상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성당에 들어선다. 전광판에는 입당이란 글자 옆에 숫자가 보인다. 성당에 들어서는걸 입당이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옆에 숫자는 무슨 뜻이얌? 오늘 성당에 들어온 사람 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케는 미사시간이 달라 같이 참여하질 못했으니 달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페이지를 말하지 않아도 교우들은 성가를 부르고, 신부님의 선창에 뒤를 이어 따라했다. 음표를 보고 음정을 맞추는 교우들을 보면서 나 역시 세월의 더께가 더해지면 성경책을 보지 않고도 같이 할 수 있을까는 의구심이 인다.
성당엘 다니고 난 후 두번이나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지난 9월 25일은 용인 천주교 묘지에 잠들어 계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역과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새남터성지! 1801년(순조1)신유박해. 많은 천주교도인들을 처형한 장소다. 마포구 양화도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절두산성지!를 다녀왔다. 그리고 지난 10월 30일은 부산에 있는 오륜대순교자박물관과 남천동에 있는 교구청과 남천성당을 순례를 했다. 좀 더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 생각의 도출이다.
외부에서 알려진 가톨릭은 마리아님을 믿는 종교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님이라, 존경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라고한다.
12월 18일에는 세례를 받고 세례명도 부여 받는다. 세례명을 정해두라는 교리샘의 말씀에 선뜻 정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성인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는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 18일이 축일을 갖고 있는 <소피아> 라는 세례명으로 정했다. 세례명의 뜻을 가진 '지혜'!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처리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소피아>라는 세례명으로 정했다. 간절히 바로옵건데, 마음 속 깉은 곳에 하느님을 늘 가까이 하는 믿음으로 알에서 에벌레로 에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다시 성충으로...우화등선(羽化登仙)하듯! 걸음마 하든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듯이 제 믿음도 그렇게 성장을 해졌음 좋겠습니다. 계란 속에서의 병아리는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안에서 부지런히 쪼고 어미닭은 밖에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쪼는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처럼 하느님도 제가 빨리 믿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손을 잡고 이끌어주셨음 좋겠다. 식사를 앞에 놓고 기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 하지 부끄러운 마음이 일기도 햇었던 지난날들이였지만, 요즘은 조금 용기가 생겼다. 같은 모양의 여덟개 손가락이 마주하고 엄지손가락은 십자를 하고 입속으로 주님의 기도를 외운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나의 얕은 신앙심도 서서히 내 마음 저변으로 퍼져 깊은 울음으로 자리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너무 보잘 것 없는 믿음이기에 신앙인으로 화인(火印) 되어지는 자체가 부끄러울만큼 신앙심이 얕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