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분이라도 늦어 자기를 좀 기다려 달라며 전화해 애원해도 소용없습니다. 절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해놓은 시간은 지켜야한다는 원칙을 세울려면 그렇게 해야해요. 단체 생활에서 어느 한 개인을 위해 기다려 줄 수 없고, 시간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정확히 5시에 출발합니다. " 평소때 미사 강론에서 느낌 받았던 부드러웠던 이미지 뒤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한다는 신부님의 강한 인토네이션에 움찔해졌다.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집에서는 일찍 출발했는데, 도로 정체로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대면서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출퇴근 시간이나 학생들 통학시간인 러시 아워라면, 교통 혼잡으로 도로가 정체될 걸 감안해서 조금 더 일찍 집에서 출발하면 될 걸 같은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 시간을 맞춰나가면 어리석게 본다는 피해의식 내지는 다른 사람들도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만 손해본다는 의식이 마음 한 구석에 내재되어있지 않나는 생각이다. 밤새 뒤척였다. 시각을 맞춰 휴대전화 알람을 설정했었지만, 혹시 제 시각에 알람이 울리지 않으면 어떡하나는 생뚱한 불안감이 밤새 잠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이른 시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신경이 쓰여 누구나 다 그럴 것이긴 하다.
새벽 4시 30분 쯤 작은 부엌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많은 수의 차량들이 불을 밝히고 탑승자를 기다리고 있다. 참여자가 400명을 넘어 9대의 차량이 움직인다. 많은 차량이 움직여야하다보니 주차할 공간이 마뜩지 않아 우리 아파트 앞, 신작로에서 주차해놓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탑승할 차량은 2호차였다. 3호차까진 조용하게 갈 사람들로 안배를 했고, 나머지 차량에 탑승하는 사람들은 놀기를 즐겨하는 사람들로 자리를 배치 한 모양이다.
어둠을 뚫고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은 하루의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 시그널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내달렸다. 옆지기로 탑승한 사람은 성격이 아주 활달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고, 성당에 다닌지는 30년차인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4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예비신자를 위한 배려라는 귀뜸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정담을 주고 받는걸 보면서 부러웁기까지했다. 나도 오랫동안 성당엘 다니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는 생각이 일었다. 혼자 있길 즐기고, 사람들과 잘 사귈 줄 모르는 나의 성격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잠을 설친 누적된 피로는 차량의 덜컹거림의 흐름에 맞춰 금세 잠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흔들림의 리듬은 마치 아기를 재우기 위해 아기를 팔에 안고 흔들어주는 엄마의 손길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휙휙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여기 저기서 도란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에 눈을 감았다 떳다를 반복하며 내달린 시각이 5시간 쯤 지나고 나니 성직자 묘역에 도착했다. 신부님의 인도로 김수환 추기경 묘소에서 큰절로 참배를 했다.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일생을 사신 추기경님의 높고 깊으신 신념, 봉분아래 상석, 참배객들이 두고간 꽃들 속에서 웃고 있는 인자한 사진 모습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두번째로 들린 새남터 순교 성지. 가톨릭 순교성지 중의 하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일명 ‘노들’ 또는 한문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이 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양식을 탈피한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전시관·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그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로는 주로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즉,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L.M.J.)·모방(Maubant, P.)·샤스탕(Chastan, J.)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첫 한국인 신부이었던 김대건(金大建)과 현석문(玄錫文) 등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S.F.)와 도리(Dorie, P.H.) 등 5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정의배(丁義培)·우세영(禹世英) 등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에서 군문효수에 처하여졌다. 이렇듯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므로 한국천주교에서는 1950년 새남터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는 동시, 1956년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고, 1984년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네이버 발췌)
성전에 들리니 까만 사제복을 입은 수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다른 신부들과 다른 모습을 말해보라고 했다. 모든 신부님은 로만컬러가 달린 사제복인데비해 후드가 달리고 트렌스 코트처럼 기장이 긴 제복이었다. 양쪽 벽으로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양각되어있었다. 왼쪽 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성인들, 오른쪽에는 14분의 성인들이라는 수사의 설명이 있었다. 아치형을 이룬 벽의 맨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형상이 있고, 목자를 상징하는 양의 조형물, 그 아래로는 예수님 발 부분에는 깨끗함을 상징하는 백합의 모양이 조각되어있었다. 제단 위에는 맑은 울림을 세상에 울리게 하기 위한 만들어진 조형물은 장구였다. 양쪽 끝이 올라간 제단은 임금의 수라상을 본뜬 조형물이다.
세번째로 들린 절두산 성지. 김대건 신부상 앞에서 미사시간을 가졌다. 많은 성인들이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 갖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지키려했던 숭고한 의식,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장소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땅속에 스며들어있는 순교자들의 氣運을 받아 신앙심이 깊어지길 갈망하는 마음이 일었다. 신부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아들 둘을 가진 농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두 아들에게 밭에 나가 일을 하라고 시켰다. 큰 아들은 하지 않을꺼라며 거절을 했다. 두번 째 아들은 아버지 말을 따를 것이라며 밭엘 나가는척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버지 말씀은 거역했지만, 곰곰히 생각을 해본 큰 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따를 것이라며 좀전의 마음을 바꿔 밭에 나가 일을 했고, 두번 째 아들은 아버지 말을 따를 것처럼 대답은 했지만, 밭엘 나가지 않았다. 첫번 째 아들이 마음을 바꿨다는 말은 결국 마음을 화개했다는 뜻입니다. 여기 모인 많은 신자들도 성당에 와서는 주님을 따를 것이라며 말은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하는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첫 아들과 같이 마음을 바꿔 깊이 있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다. 나 역시 둘째 아들같이 성당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마음이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하는 행동은 달라진다. 밥을 먹을 때의 기도도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 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하느님께 어려움을 호소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교리선생님의 말을 한 번도 실천하지 않았다.
많은 신자들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하고 신부님의 포옹이 있었다. 몇 달동안 밤잠을 설쳤을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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