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삶과 죽음

정순이 2010. 8. 15. 19:04

 "따르릉"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텅빈 집안이라, 그 울림이 더 큰 듯했다. "이 시간에?" 이른 아침에 전화가

걸려온다는건 걱정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민규가?" 둘째 형님 목소리다. "형님이 이 시간에 어쩐일이세요?"

"요즘 큰 형님 만난 적 있나?" 생뚱한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큰형님과  조우한 기억을 더듬었다. " 보름은 된 것 같은데요? 출근하는데, 마주오는 형님을

두어 번 본 적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예요?" "좀전에 큰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11시까지 큰집으로 좀 모이라고 하네...무슨 일이지? 동서는 아는 거 없나? 큰집으로 모이라는  전화는 왔었더나? " "아직은요.."큰형님 성정에 모든 동서들을 아무일 없이 부를 까닭이 없다. '그렇담?'

 

불길한 상상들이 자꾸만 머리속을 헤집는다. 달포 전에도 큰동서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잠시 올라올래?" 되묻질 않고 손살같이 달려가니 셋째 동서가 보였다. "아, 밥이나 한끼 같이 하자고...." 셋째 동서는 수영장에서의 실족으로 심한 타박상을 입고  두어 달 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다. 수술은 잘 됐지만, 예후가 좋지않을 경우 인공관절을 넣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으로 많은 걱정을 했었다. 다행스럽게 경과는 좋았다. 그렇지만 아직 가부좌는 틀지 못할정도로 후유증은 남아있다. 그 셋째 동서가  점심이나 한끼 하자고 시댁에 들렀고, 셋이서  점심이나 한끼 하자고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큰동서로부터 전화를 받고 5분거리인 시댁까지 가면서 엉뚱하고 불긴한 상상을  한 걸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오기까지했었던 기억. '이번에도 그럴꺼야' 스스로 위무하며 초조하게 시간을 기다렸다.

 

10시 40분, 41분...시간을 체크하니 기다리는 시간은 더 더딘 것 같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시댁 현관앞에서 위를 한 번 올려다보다가 살짜기 문을 밀쳤다. 삐그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인기척을 하는 큰동서 "누고..?" "형님, 저예요." "그래..어서 온나" 아직 다른 동서들은 오지 않은 듯 신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오겠지?" 누워있다 일어나는 큰동서를 보니 살이 좀 빠진 듯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찾아왔으니 섯불리 말을 꺼내기도 멋적어 큰동서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한 달 전 기침이 자꾸 나오기에 가까운 의원에 갔었어. 친식약을 좀 달라고 했드니 의사샘이 '그러지 말고 정확한 검진을 받아보고 그에 맞춰 약을 드십시요.' 하더라구, 내친김에 자주 다니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지. 의사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라구. 순간 '결과가 안 좋은가? '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더라구. 아니나 다를까 '큰 병원에 가셔서 세밀한 검사를 받아보세요.'라는 거야.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듯 현기증이 일더라구! '무슨 일이 터졌군' 다급한 마음에 바로 큰병원에 갔지. 검진을  하고 나니 의사샘이 '보호자를 부르라'더군. 심각하다는걸 눈치챘지. 대처에 나가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난 후 의사선생님에게 물었지.'무슨 병이냐구' '폐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 담배도 피우지 않는 내가 무슨 폐암이야?' "2년 전에 건강검진 받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요?" 검진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의사샘에게 되물었지. 그랬드니 그러시더군 '2년 전에 이런 결과가 나왔으면 벌써 죽었죠." 힘들게 묻는 내게 너무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어. 할말이 없더군. '어디로 전이 됐는지,  세밀한 검진을 해야합니다. 입원준비 하세요."

 

5일동안 입원해서 검진한결과 엉덩이 부분에 이미 전이 됐다는 사실과, 전이가 돼 수술을 할 수가 없어 항암치료만 해야한다는 거...다들 할말을 잃었다. 결혼을 하고 처음 시댁에 들렀을 때  잘생기고 공부를 잘해  학원 한 번 보내지 않고도 명문 대학엘 갈 수 있다는게 부러웠고, 아버님의 부재에도 어머님께 아침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시숙님...늘 반듯한 생활로 외경심을 갖게 하는 동인이 됐었다. 그러던 시댁에서 암운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시숙님이 아프시면서다. 일년의 힘든 투병끝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다시 2년 후 엎친데 덮친격으로 말벗삼아 자리를 지켜주시든 시어머님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덩그렇게 남아있는 큰집에서 큰동서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강인한 성품으로  한치의 꺾임도 보이지않고 늘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앞에 섰던  큰동서...

 

"나는 나 자신에게 참 고마운게 있어. 이런 큰일 앞에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거..."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동서들을 부른건 제사건 때문이야." "형님, 이 상황에서 제사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러세요?" 라는 우리들의 반문에 "맏이가 돼서 그런가봐. 항암치료 받으려고 며칠동안 입원해있으면서 제사때문에 제일 걱정이 되더라. 내가 내 할일을 다 못하고 가는거 같아서..."다들 숙연해졌다. "언젠가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죽고 난 후 내 제사하고 시숙 제사는 서울에 있는 아들 둘이서 지낼테지만, 어머님 아버님 제사는 자식들이 부산에 있으니 자식들이 지내야 하지 않겠나 싶어 불렀어.  그러니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든지 알아서들 해..."  도회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을 부르고, 며칠동안 입원해 항암치료까지 받으면서도 형제들이 걱정할까봐 한달만에 그것도 제사가 걱정이 돼서 전화를 했었다는 큰동서.

 

간헐적으로 기침을 하던 큰동서가 하얀 마스크를 찾아 입을 가리는 뒤로 파란 잔디 위에서 두 팔로  큰 동서를 번쩍 들어올린 다음 힘에 부치는 듯, 멋적은 듯 파안대소를 하는 큰시숙님과 큰동서의 사진이 눈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산다는게  무엇인지! 둔중한  물음이 어깨를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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