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잊은 초겨울의 단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낮은 담장너머로 덩그마니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감나무는 나뭇잎을 다 떨쳐낸 후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빨간 홍시 몇 개가 말벗이라도 되어주겠다는 듯 보였고,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는 겨울을 재촉하고 있는듯했다. 이 비가 끝나고나면 또 북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과 함께 세찬바람을 동반한 추위가 옷깃을 여밀게 할 것이다.
“찌개할 고기 좀 주세요.” 가벼운 인사와 함께 허공에서 눈만 마주쳤는데도 어제 왔던 고객이란걸 단박에 알수 있었다. 자주오는 고객이라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번을 들러도 기억에 남는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특징적으로 생겼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많은 양을 구입하는 고객은 한 번만 와도 기억을 하게 된다. 어제 온 고객은 전자에 속한다. 겉에 입은 외투 아래로 병원로고가 찍혀있는 병원복이 드러난걸 보니 가까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인 모양이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른 듯 보이는 스포츠 머리, 그 아래로 이마에 길다랗게 흉터도 보인다. 메스를 대고 듬성듬성 봉합을 한 흔적이 보이고, 그 아래 코 옆으로는 자상 (刺傷)의 흔적도 남아있다.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있어 햇빛을 보지 못한탓인지 하얀피부는 병색짙은 환자처럼 보이기까지했다.
“얼마나 드릴까요?” “4천5백원어치 주세요.” 진열장안 S자모양의 걸쇠에 걸려진 고기를 꺼내 주문한 양만큼 저울에 달고 있는 옆에서 “5천원치 사오라하는걸 5백원은 제가 할려구 4천5백원치 달라고 한거에요.” 자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힐 비밀인데도 굳이 틀어놓으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보는거 같아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같이 입원해 있는 사람인데 찌개가 먹고 싶다며 날더러 사갖고오라지 머에요.” “어느 병원요?” “00병원요.” “아, 그렇담 금사사거리에 있는 그 병원말이군요.” “네~” 다시 해맑은 웃음으로 대답을 하곤 총총히 사라진다.
그 병원이 입점해있는 곳은 4차선 도로를 낀 사거리라서인지 아직 상권이 형성되어있지않다. 사선을 그은 맞은편에 중저가 옷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매장이 하나 있다. 연전까지만해도 국내굴지의 이름있는 전자대리점이 로타리를 둘러싸고 세 군대나 입점해 서로 경쟁을 하곤했었는데, 몇 년 장사를 해보드니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인지 한 곳은 문을 닫고 말았다. 길 하나를 사이에두고 두어 군데 전자대리점이 입점해있지만, 매장하나는 한 가전업체에서만 들어오는 전문매장이라인지 소비자의 욕구를 골고루 충족시키지 못해 출입하는 고객이 많지않다. 다른 매장에서는 여러 가전업체에서 들어오는 전자제품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인지 고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문매장으로 전자대리점을 하고 있는 2층 건물이 한동안 비어있는거 같드니 어느날 병원로고가 찍힌 돌출간판이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게 눈에 띄었다. 경기 침체와 긴 불황으로 공실률이 높아 비어있는 건물들이 많음을 피부로 느껴질만큼 불황의 늪은 깊고 크다.
아파트에서 가게로 출근하기 위해 5분 여, 20도 정도의 가파란 길을 걸어내려오면 사거리가 있고 한 모퉁이에 노인들의 전문병원이 있다. 지하에는 주차장이 있고, 1층에는 전자대리점, 2층부터 5층까지 병원이 입주해 있는데 2층에서는 내원환자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진료실이 있고, 그 위층 부터는 입원실을 비롯해 가족들이 돌보지않아 갈곳이 없어진 행려병자라든가, 독거인,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도움을 주는 호스피스 병동도 5층에 입주해있다. 언제인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횡단보도를 건넜을때 집으로 보내달라며 절규하던 할머니를 병원에 다시 모시고 가기위해 간호사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던 그 할머니도 입원해 있는 곳이 아닌가.
조금 전 가게에 들린 고객은 5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그렇게 젊은 사람이 그 병원에 입원해있는걸 미루어 짐작한다면, 가족들이 그를 버렸지않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비용을 감당하지 못했다든가, 내지는 집안에 전혀 도움이되지 않으니 물건을 버리듯 유기(遺棄)해버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객이 가고 난 후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고객의 해맑은 웃음뒤로 드리워진 암운때문이였을까? 순간 왜 그렇게 서글퍼지는지.....내일이 아님에도....누구에게나 맞닥뜨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무언의 침묵으로 나를 서글프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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