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야,다가오는 일요일날 동창회 한다든데, 갈래..?"
연전(年前), 같은 동네 살았던 남자친구는 자기한테 어떤 말을 했었는데, 왜 그말을 했었는지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 알고 싶어했던 친구가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그 이야기를 되새김질 하듯 했었고, 동창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지근거리에 살고 있긴하나 각자 자신의 삶의 여백을 채워가느라 만남이 잦진 않다. 해서 그 남자친구를 만나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어도 달리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며칠 전, 동창회 여성총무로부터 이번에는 부산에서 동창회를 개최하게 됐으니, 꼭 동창회에 참석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별로 내켜하지 않았던터라 시컨둥한 반응으로 응대했고, 전화기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아차' 갑자기 동창회를 개최하게되면 자신에게도 꼭 알려달라는 친구의 말이 기억의 폴드 속에서 뚜껑을 밀치며 얼굴을 내밀었다.
휴대전화 폴드를 밀어올리고 저장되어있는 친구 이름을 검색한 뒤 자음의 ㄱ을 찾았다. 페이지 다운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낯익은 이름이 검색됐고, 통화버튼을 누르고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나니, 낯익은 목소리가 공기의 파장을 가르고 들려왔다.
"00야, 이번 넷째주 일요일날 동창회 한다는데, 갈래?"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응을 보이는 친구 "그래, 가자. 나 그애가 무지 보고 싶어. 왜 그 애가 그때 나한테 그 말을 했는지도 알고 싶구..."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든가? 여우도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하지않는가. 하물며 사람임에야... 비록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도처에 나왔지만, 고향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끊임없이 생성됐을터이다. 나 역시 그랬다, 고향을 등진지 십수년만에, 결혼을 하고도 몇 년이 흘렀어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맡고 싶어 시골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던 기억...조각난 기억들을 퍼즐 게임하 듯 기억을 더듬으며 고향을 향했었다. 그러나 다 맞춘 퍼즐의 완성된 그림은 예상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였다. 내 기억속에 남아있던 고향은 아날로그의 서정은 한갓 낡음으로 비쳐졌고, 나의 안온했던 보금자리는 금세라도 손을 대면 쓰러질 것 같고 주저앉아 내릴 것만 같았다... 그토록 갈망했고, 가보고 싶어했던 고향의 모습은 아니라는 허탈감....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아내의 친한 친구가 같이 간다는 기꺼움에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친구의 남편. 늘 자기 중심적인 남편을 봐오다 친구 남편의 살가움을 보니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을 채마치기도 전에 부산으로 전학을 왔었다. 2학년 2학기 말에서 기억이 멈춰버렸는데도, 많은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을 잘그리는 자신의 전학을 안타까워하던 교장선생님이 전학서를 끊어주지않았다는 기억..아랫동네에 살던 여자친구 남자 친구(친구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누구와 미술대회에 나갔다는 기억...자신이 이사 오든 날 이른 새벽, 자신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담벼락 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내 눈망울도 기억하고 있었다. " 헤어지기 싫었다거나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대문밖으로 나가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을일이지 뭐하러 그런 행동을 했을까"는 나의 반문에 객쩍은 표정과 함께 자신도 알 길이 없다는 듯 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걸 보니 모임장소가 멀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다. 겨울의 황량한 바닷가는 시대변천에 합류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문화의 거리로 변모해있었다. 해안도로 따라 조성되어있는 나무가지사이에 연결지어져있는 전기선들은 밤의 제전에 동원된 조연배우들이다.
우뚝우뚝 솟아있는 빌딩, 알록달록한 원색의 돌출간판과 입간판으로 찾으려는 상호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운전을 자주하는 사람들은 거리감각과 지리감각이 뛰어나다. 얼마지나지 않아 약속장소를 찾아내는 친구남편..."재미있게 놀다오라"며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친구남편...5m두께의 두꺼운 유리문을 밀치고 식당안으로 들어서니 조용하다. <몇 회 동창회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라도 걸려있지않겠나는 기대와는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3월말의 식당안은 한산했다. 군데 군데 서너명의 사람들이 가벼운 담소로 시간을 메꾸고 있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식당주인 듯한 사람이 무슨 일로 왔냐는 듯한 뚱한 표정이다. 화려한 외벽을 한 건물, 광안리 바닷가를 낀 5층의 건물이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아 그런 행동(반기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 인지 모른다. "혹시 동창회..."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그럼, 각북?..." "네" "절 따라오세요."라며 우리를 안내했다.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창 너머로 광안대교의 조망이 시야를 틔운다. 낮은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서너명의 친구들! 세 명 중 같은 동네에 살았던 낯익은 친구에게 "누구 맞지?" 며 손을 내미니 그제서야 알아보고 손을 마주 잡았고, 옆에 있던 친구들도 반색을 하며 악수를 해왔다. 30년 내지 40여년의 시공간을 뛰어넘고 만난 유소년(幼少年)의 추억들이 초음속으로 내달려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뒷벽을 보니 동창회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친구의 부연설명은 식당 주인장은 두 해 위의 선배동문이였다. 주인장이 우리를 위해 현수막을 물품 찬조를 한 셈이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는 기대감에 4십년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과 소학교 친구들 ...정말 만나서 반가웠다. 같이 간 친구는 식탁을 달리하며, 많은 친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즐겻다. 친구의 그런 여유있는 즐김이 부러우면서도 내 행동은 그러질 못했다.
아해(兒孩)때의 모습들이 아직 남아있는 친구도 있었고, 몰라보게 변모해버린 친구들이 더 많았다. 악수를 하면서 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게 기억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될 듯해 손을 잡을때마다 내이름을 댔고, 손을 맞잡은 친구도 자신의 이름을 대면 어릴때의 친구모습이 중첩되어와 기억하는데 도움이 됐다. 몇 순배 술잔이 오가고 내 이름을 호명하며 인사를 하라고 했다. 나즈막한 소리로 "두번째 왔는데..."며 말끝을 흐리자, 처음 온 사람들도 있으니 인사를 해야한다고 했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두 번의 요구에 엉거주춤 일어섰고, 신고식을 치르듯 더듬거렸다.
"나는 00 살았던 000야! 다들 기억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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