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쯤 가게 오시는 분께 고추를 부탁한 적이 있다. 막내올케로부터 얻어먹은 고춧가루 빛깔이 너무 고왔다. 친정 올케로부터 얻어 먹고 부터는 가게에 오는 지인을 통해서 고추나 구입하기로 했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연히 알게된 지인의 큰 동서는 시골에서 고추농사를 짓는다는걸 알게 되었고, 해마다 지인을 통해 일년동안 먹을 수 있는 양만큼의 고추를 구입하고 있다.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큰동서 내외는 고추를 팔아 이익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년동안 먹는 양식이라 생각하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추를 구입한 고객들은 한번 맛본 고추맛에 너도 나도 주문하게 되었고,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고객들의 성화에 해마다 다른 작물을 심으려든 밭에 고추만을 파종하게 되었고 지금은 적지 않은 이익을 얻고 있다.^ 우리가족이 일년동안 먹는 고춧가루의 양은 열다섯 근 정도다. 열다섯근의 고추를 빻을때마다 고추장으로 빻는 분량이 더 많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남편의 치아가 좋았을 때는 김치를 자주 담아먹었다. 해서 고추장거리용 보다는 김치를 담는 고춧가루용으로 빻는 양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고추장을 많이 먹는편이다.
여름이되면 비빔국수나 비빔밥을 좋아해 자주 해먹게 되니 같은 분량의 고추를 빻았는데도 고춧가루는 아직 남아있지만, 고추장 단지는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되었다. 해서 가게에 들린 그녀에게 빨리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게되었고, 엊그제는 신경을 쓰고 있었든 듯 시골 가는 길에 고추를 가져왔다는 말과 숨을 몰아쉬며 커다란 비닐에 담긴 고추를 잔뜩 들고왔다. "얼마에요?" "65000원" "작년보다 더 싸네요, 가격이 내린거에요? " "그런건 아니구, 고추빛깔이 작년 같지않고 희끄무레한게 많아서요. 동서의 말을 빌리자면 말리는 과정에서 비가 와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 마음에 들지않으면 반품해 되요." "보기에는 괜찮아보이는데요."
"그래요? 보기는 그래도 빻아보면 색깔은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어요." "항상 고마워요, 이렇게 앉아서 좋은 물건을 사먹으니 말이에요." "아니에요, 나는 팔아서 좋은걸요. 우리 큰 동서가 시골에서 고추농사를 짓는데서 하는말이 아니구, 농사하나만큼은 신경써서 짓는거 같아요. 해마다 먹어보는 많은 사람들이 주문을 하거든요." "그럴 것 같아요, 나도 몇 번 동안 먹어보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던걸요." "먹어본 사람들이 자꾸 주문을 하니 주문양이 많아서 농사짓는 양을 늘리기도 한걸요." 그녀는 고추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반품을 해도 할말이 없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
그렇게 양심을 가지고 직거래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부탁을 하나보죠?. 시골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분은 직거래를 통해서 얻게 되는 수익은 도매로 넘기는 것보다 더 나은 차익이 날테고, 우리 같은 먹거리 소비자들은 시중에서 사먹는 가격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속지 않고 구입할 수 있다는 게 좋은거죠." 가져온 고추 꼭지를 따내니 한근 정도의 분량은 나가는 듯했다. 매번 고추를 빻을 때마다 고춧집 여주인은 넉넉한 저울 눈금에 고추를 갖다 주는 농부의 후덕함을 이야기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온 고추를 빻아 저울에 달아보곤하지만 대체로 저울 눈금이 많이 내려가거든요. 고추 꼭지를 딴 양만큼 저울 눈금이 내려가는거야 당연하지만, 꼭지를 따기 전의 무게가 너무 정확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골 인심이 더 야박하다는 생각이 드는거 있죠?" 방앗간 주인 여동생이 고추를 빻는동안 주인과 나란히 마주하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집에는 남편이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그분의 검지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니 그가게의 남자분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00엄마는 가게 부엌에서 맡겨진 일만 하는데 비해서, 남편은 집안일을 죄다 하고 있어요." "남편이 많이 도와주나보죠?" "도와주다니요? 그런말이 어딨어요? 남편이 할 일을 아내가 도와주는거죠."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 멍해왔다. 그녀가 하는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대저 우리여성들은 정체성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가게일과 집안일, 아이들 뒷바라지 3중고를 겪으면서도 자신이 짊어진 짐이냥 묵묵히 해나가는 걸 보면 때로는 눈물이 날 정도다.
왜 아내들은 남편의 일을 나누어 지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지 말이다. 남편이 할 일을 아내가 도와주는 입장이여야 할텐데 많은 아내들은, 가게를 하는 여성들은 남편들이 일을 하지않아아도 달리 목소리를 내지 않고, 참고 사는게 가정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해서 아내들은 하루종일 가게에 와서 힘든 삶을 살아아고 있지만 적지 않은 남편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 고스톱을 친다든가 낚시를 다니는 사람을 주변에서 볼때면 형평성에 맞지않는 부당함에 속이 상해온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내가 다반사고 어쩌다 남편들이 일이라도 하면 아내를 도와 주는 남편이 대견하다는 듯이 말을 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여성들이, 또는 아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남편들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어보였고, 어쩌다 일을 할경우에는 목에 힘을 주는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가게에 들리는 여성분들이 남편이 가게일을 도와주는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왜? 아내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는 듯 말을 하곤 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던 내가 고추방앗간 주인 앞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은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분명하게 요구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나 인권을 보장받는 다는 사실을 순간이나마 간과한거 같아 부끄러웠다. 나자신을 사랑할 때, 남들도 자신을 아껴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잠시나마 망각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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