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잠자리에 들은 탓인지 새벽녘 눈이 뜨인 나는 잔잔한 음악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나와 탁자옆으로 앉을 자리를 물색했다. 새벽녘이라 아파트 주변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버티컬 틈 사이를 비집고 새어들어와 은은한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부박한 삶을 살아오면서 이런 분위기를 자주 갖지 못해든 탓에 베란다까지 가득찬 뒷산의 나무향기와 고개를 돌리기라도 하면 아파트 주위로 해자처럼 조경되어진 나무숲에 어느내 내 마음은 점령당할 것 같았고, 그런 분위기의 심연에 함몰되어보고도 싶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사이로 추임새마냥 들려오는 여치소리는 어린시절, 기억의 편린들이 콜라주처럼 나열되어 나온다. 46년동안 살아오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든 듯 여치소리에 귀를 쫑긋이며 스피커 볼륨을 낮추었다.
들리지 않는 음악소리에 눈을 뜬 남편은 "니 언제부터 거기 앉아있었노?" "조금 전에요.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눈이 일찍 뜨이더라구요. 아니 이시간에 어쩐일로 일어났어요?"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그렇지...." 새벽잠이 많은 남편의 기상시간은 항상 8시를 넘는다.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이 아니니 굳이 일찍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 새벽을 가르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나 부지런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게으름을 찬미하는 사람인지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서, 어쩌다 8시이전에 잠자고 있는 남편옆에서 부시럭거리기만해도 자신의 눈을 뜨게한 아내를 원망스러운 듯 "지금 몇신데 깨우노?" 라며 언성을 높이곤 한다. 자신이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이른 시각에 일어나면 억울하다는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눈을 떠며 말을 건네오니 의아해 할 수밖에....
사람들은 자율신경발달로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들리지 않는 음악소리에 눈이 뜨였다는 남편의 말을 이해될 듯했다. 요즘같은 더운 여름이면 거실소퍼에서 잠을 자는 남편은 컴퓨터로 다운로드 받아둔 음악을 MP3 에 삽입해 틀어놓고 잠자리에 들곤한다. 선곡해 둔 곡이 거의 조용한 음악이라 새벽녘 물을 먹기 위해 방문을 열면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에 매료되곤 할때도 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우리 오늘 산에나 갈까?" "그래요. 산에갔다와요." 뒷산 약수터에 발길을 끊은지도 거의 일년은 된 듯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은 아내와 같이 산책 해 줄수 없는 미안함에 들여놓은 <러닝머신>으로 인해 면죄부라도 받은 듯 느긋한 아침잠을 즐기곤 한다.
그런 남편이 어쩐일로 약수터에 가자는 말에 반색을 하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신들메를 단단히 고쳐신었다. 산 초입에 들어서면 길섶으로 심겨진 나뭇잎에 다리가 긁힐지 몰라 긴바지를 입을려다 더위를 못 견딜 것 같아 반바지를 입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입을 요량으로 장롱속에 넣어둔 긴바지를 한번의 산책으로 인해 꺼내입기가 뭣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시간동안만 입을텐데 다시 세탁하려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에서 <러닝머신>으로 단련되어진 듯했던 신체는 조금 경사가 가파른데서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걸 보니 집에서 뛰는 '러닝머신'의 운동효과는 미미했던 듯 했다. 평지로 설정해놓은 <러닝머신>을 뛸때와 경사가 있는 산을 오르는 데는 많은 차이를 보였기때문이다. "다가오는 이번 일요일에는 '금정산' 에 갔다오자, 짧은 코스에서도 이렇게 힘이 드는걸 보니, 집에서 러닝머신하는걸로는 운동효과가 별로인갑다."
혼자소린 듯 뱉어내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루걸러 격일제로 <러닝머신>을 하는 남편이지만 뒷산 오르는거야 우습게 생각했을 터였고, 그게 여의치 않으니 4시간 코스인 <금정산>을 다녀와 힘을 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남들은 체력단련을 한다며 '헬스클럽' 이나 '수영장' 에 다니며 호들갑을 떨고있지만 돈한푼 들이지 않아도 되는 뒷산 약수터 산책은 '산림욕' 이라는 건강효과와 살을 빼는 시너지를 얻을 것이다. 약수터 옆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융단처럼 깔려있는 하얀 꽃잎들이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불러왔다. 집 뒤 공간에 심겨진 감나무 밑으로 뿌려놓은 듯 떨어져 있는 감꽃잎들을 하나씩 바늘로 꿰어 목걸이로 만들곤 했던 기억들과 긴긴 여름밤을 무료하게 보낼수 없어 군것질원으로는 더없이 훌륭했던 설익은 감....그래도 그때는 맛이 있었고, 여름밤이 풍요로웠다.
한참을 오르니 산등성이를 뎅강 잘라놓고 무슨 공사를 하는 곳이 보였다. 등산길 옆으로 둘러쳐져 있는 바리케이드 밖으로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 상수도공사 중이오니 불편하시더라도 다른등산길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불과 일년만인데도 많은게 바뀌어져 있었다. 등산객들이 즐겨 이용했던, 운동기구들도 모습을 감춘 듯 보이지 않았다. 뒤틀려진 등산로 로 인해 몇번을 헤맨 끝에 집에 돌아올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