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면서 길옆으로 철시된 가게들이 꽤 많이 눈에 뜨인다. 아마 많은 분들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사찰이나 암자를 찾아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무사안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리러 갔을 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써는 불교를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지만 내가 본 느낌을 전제로 글을 썼음을 미리 밝혀두련다.
몇 년 전 '경주 불국사' 를 찾았을 때 머리위로 매달려있는 크고 작은 등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달려있었다. 등 갓 아래로 나비모양의 부직포에 쓰여진 글귀는 작은 바람에도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그 전에 아파트 뒷산 작은 암자에서 본 등의 양과는 비견을 할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사찰의 규모에 따라서나 스님의 인지도에 따라서 등값이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다른 이유를 달고 싶지 않지만 왠지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절에 다니는 신도들의 청원으로 일년동안 달아두는 등에 매겨지는 가격과 가족 한사람이 추가 될 때마다 등값도 비례한다는 말은 왠지 스님들도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또 규모가 큰 사찰에서 다는 등값은 작은 암자에서 다는 등값의 몇 배 라는 소리를 듣고 아연해지고 말았다. 가까운 곳에 등산을 가거나 하다못해 뒷산에 올라도 흔하게 맞딱뜨리는게 사찰이 아닌가 생각한다. 등이 달려있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니 덩치가 큰 등은 대웅전 주변에 달려있는 듯 했고, 크기가 작은 등들은 일주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달려있는 듯 해 보는이로 하여금 씁쓸함의 여운이 가시지 않게 하였던 기억이 스님들도 세태의 흐름에 합류하며 세속적으로 변해가는거 같아 의미모를 웃음이 비집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貧者一燈' 이라는 귀한 글귀가 있다. 원래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라는 뜻으로 불경인 현우경의 빈녀난타품에서 비롯된 말이다.
석가께서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각각 신분에 걸맞는 공양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어느 가난한 여인이 "모처럼 스님을 뵙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공양도 할 수 없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돈 한 푼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갔다. 한 푼어치 기름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되지 않았으나 그 여인의 말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갸륵하게 생각하여 한 푼의 몇 배나 되는 기름을 주었다. 난타라고 하는 이 여인은 그 기름으로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 수많은 등불 속에서 이상하게도 난타가 바친 등불만이 새벽까지 남아서 밝게 타고 있었다. 손으로 바람을 보내거나 옷자락으로 흔들어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나중에 석가는 난타의 그 정성을 알고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만 해도 몇 년 전으로 기억을 소급해 올라가야한다. <시장 상우회>에서 봄 야유회겸 사월 초파일을 앞두고 '삼사 순례'를 한적이 있다. 두군데 사찰을 돌고 마지막 사찰 입구에 들었을 때는 이미 해가 어둑어둑 졌을 때다. 산사의 고즈늑함속에서 잔잔히 울려퍼지는 목탁소리나 독경소리의 청아함에 발길을 멈추고 싶었던 기억이 '석가탄신일'에 새록새록 피어오르며 나를 잠재운다.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트로이(troy)영화를 보고나서... (0) | 2004.05.28 |
---|---|
言語의 덫 (0) | 2004.05.27 |
양심의 자유에 의한 병역거부 (0) | 2004.05.25 |
향수에 젖어... (0) | 2004.05.23 |
부부의 날 아침에... (0) | 200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