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봄내음 속으로...

정순이 2004. 4. 12. 11:40

며칠전부터 두째주 일요일에는 야외나 다녀오자며 일찌감치 서둘렀던 남편은 나름데로의 계획을 말했다. 몇 년전 경주불국사에 인상 깊게 보았던 벚꽃이 그렇게 멋질수가 없었다며 이번에도 경주불국사 벚꽃 구경을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가까운 부산에도 벚꽃 구경은 할수 있지만 경주불국사에서 본만큼 멋지지는 않아 매번 해가 바뀔때마다 그냥 지나치곤 했다. 넓은 광장에 펼쳐진 벚꽃사이로 펼쳐진 꽃길들은 한폭의 영화속 배경같았고, 배경속의 주인공으로 나 자신을 올려놓아보곤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곤 했다. 해정한 가지를 드리우고 피어있는 벚꽃나무들 사이로 연분홍빛 꽃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질 때는 하얀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듯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타임캡슐 폴드속에 각인되어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주불국사에 가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고 가까운 산으로 등산 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만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봄의 한가운데로 발길을 들여놓으니 옴니버스 추억들의 파편들이 기억을 헤집고 나온다. 빨간색의 챙이있는 모자를 챙겨들었다. 언제인가 이효리 영상을 보고 마음이 동해 하나 구입한 챙이 있는 스포츠 모자다. 지금 내나이를 지나고나면 영원히 써보지 못할 것 같은 촉박함에 큰 맘 먹고 구입했던 것이다. 빨간색의 챙이 있는 모자를 하나사면서 파란색의 모자도 같이 샀다. 번갈아 가면서 쓸까도 생각했지만 남편과 같이 커플모자로 쓰도 괜찮을 듯했기 때문이다. 예전의 고착된 관념보다 요즘은 은근히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가씨들이나 쓰는 걸로 받아들이는 아날로그생각에서 조금도 빗겨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저께는 양단에 무늬까지 곁들어진 바지를 사 입은것도 요즘들어서 생긴 내 용기의 결과물이다. 남편은 장롱속에 쟁여둔 벙거지 모자를 챙겨들고 "어때? 커플로 산 모자보다 이 모자가 더 잘어울리는 것 같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와 같이 등산할 때 하나 구입한 벙거지 모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자신이 입는 옷을 살때도 아내인 나한테 사오라고 고집하며 사는 남편이 어쩐일로 친구와 등산을 갔다오면서 손에 들고온 모자를 보고 한참이나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얼마전 홈쇼핑을 통해 구입한 MP3를 귀에다 꽂고 더불어 벙거지모자까지 꾹 눌러선 모습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올라온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

 

등산을 갔다 내려오는 길에 들렀던 그 식당에서 가볍게 동동주나 마시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화장품을 겨우 넣을 수 있는 작은 미니가방안에 티슈 한뭉치와 휴대폰을 넣고 홀가분한 복장으로 들메끈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른 시각이라 아직 등산객들의 인파는 보이지 않았지만 길섶으로 보이는 봄의 나무들은 겨울의 매서웠던 가렴주구를 견뎌내고 해정한 가지끝에 파아란 새순이 봄을 농익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식물원앞에서 택시에서 내린 우리부부는 차가 다니는 넓은 길로 등산을 하기로 했다. 일전에 등산길을 잘 못 들어 고생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만나게 되는 행락객들은 저마다 밝은 미소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모습이 간간히 눈에 뜨인다. 식물원입구에서 시작한 등반코스는 동문을 거쳐 북문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러닝머신으로 단련된 몸이라 ‘고당봉’까지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고당봉’까지 한번 올라가봐요.” “안돼. 거기까진 무리야 내 기운으로는 3시간 코스거리인 동문에서 범어사까지의 코스가 딱 맞는거 같아. 가고 싶거든 니 혼자 갔다온나.” 속으로는 궁시렁 거렸지만 혼자 간다는건 용기가 생기지 않아 남편의 생각에 따르기로 하고 묵묵히 남편의 뒤를 따른다. 북문을 거쳐 '고당봉'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들어서자 방향을 바꾸어야 할 남편이 '고당봉' 방향으로 향하는게 아닌가. 항상 남편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혼자 생각해본 다음 내 말에 따라주는 일을 택하곤 한다.

 

고당봉을 돌아 하산하는 길에 많은 인파와 마주쳤다. 가정에서 느지막히 등산을 오는 사람들일테다. 곳곳에서 매트를 깔아놓고 집에서 준비해온 김밥이나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아보인다. 끼니를 해결 한 사람들은 잉여시간에 화투판을 벌인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우리가 찾는 식당이 멀지 않은 곳에 보인다. 탁자를 마주 하고 앉은 우리부부는 동동주를 주문해 놓고 한낮의 망중한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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