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이 몇 년 된 가로수를 금방이라도 뿌리 채 뽑아 낼 듯 하던 광풍도, 밤새 귀신 울음같이 나무끼리 부대낌의 소리도 잠이 든 듯 고요한 아침이다. 버티컬 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이 눈이 부시다. 집에서 가게까지의 거리는 멀진 않지만 양산을 받치지 않고 햇볕에 팔을 노출시켰다간 또 가려움증이 동반 할 것 같아 양산을 준비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여름에는 바로 위에 태양이 있어 건물아래 그림자가 아주 짧았다. 공전과 자전 으로인해 같은 시각에 출근하는데도 불구하고 건물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밟으니 양산이 필요치 않을만큼 가을이 성큼 우리곁으로 다가온 것 같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가게에 들리셨다.
이웃에게 선물할꺼라는 말씀과 아주 맛있는 부위를 달라는 말로 거듭 강조를 하셨다. 어느누구다 다 같은 생각으로 살겠지만, 자신은 맛있는 걸 먹지 못해도 인사치례를 해야 할 때가 생긴다. 할머니 역시 그러신 것 같았다. 아주 가끔은 최고로 맛있는 부위의 소고기를 달라는 주문을 하시곤 하지만, 그럴때는 많이 없다. 밥은 먹고 있는 와중에 오신 할머니라 밥먹는 걸 중단하고 할머님이 필요로 하는 부위를 썰고 있으니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하신다.
"젊었을 때 먹고 싶은거 많이 먹어요. 나처럼 나이 들어봐요, 맛있는게 있는지..." "할머니, 그렇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먹고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는지 골몰히 생각하곤 하는데, 반대로 연세드신분들은 입맛이 없어 괴롭다 하시는걸 보면 세상은 공평치 않는 것 같아요." "먹고 싶은게 하나도 없는 우리들이 머가 좋다고 그래요?" 이어진다. "먹지를 못하니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니 다니기도 힘이 들구만..." "할머니, 그래도 잡숫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예요? 연세가 그정도 되셨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사시겠어요? 잡숫고 싶은거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드세요." "그게 마음데로 안되더라구요. 일전에도 영지버섯을 물끓여 먹으라며 사다 주었지. "
"할머니는 안드시구요?" "나야,늙었는데 먹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한 살이라도 젊은 저들(자식들)이 먹어야 효과를 보지....자식들이 내게 주는 용돈은 그의 아들이나 손자들한테 다 쓰이거든. 가끔 집에 들리면 손자들에게 용돈이라고 한푼 주게되지, 만약에 손자들이 집에 와도 용돈 주지 않으면 손자들이 날 볼라하겠어? 그러니 손자들 용돈도 한푼 줘야하니 한달 용돈을 받아봐야 쓰임새가 많으니 항상 빠듯하지...그렇다고 영지만 사다줄수 있나,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가 멀 알겠나싶은 생각에 영지버섯과 함께 달여먹으라고 황기, 대추, 밤....다 사다주거든, 실지 영지버섯만 삶아 먹으면 너무 쓰서 먹질 못하거든....그러니 정작 내자신한테는 인색해지더라구...." "할머니도 드시고 오래 살으셔야죠."
"오래 살면 머해? 공연히 자식들한테 짐만 되는걸...." "식사는 매일 해드세요? " "혼자 살고 있으니 밥하는 것도 귀찮구 반찬 만드는 것 조차 귀찮을때가 많지, 해서 잘 해먹지 않게되더라구." "자꾸 드시지 않으니 입맛을 잃은거에요. 큰 아드님은 멀리 사시나 보죠?" 대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아들내외와 같이 가고 싶지만 외로울 것 같아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살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부모들을 흔히 보았으니까....
같은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머님을 혼자계시게 놔두지는 않했을 듯 싶은 마음에 의문부호를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한참이나 빗나갔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멀지 않은 곳(차량으로 20분거리)에 큰아들은 분가시켜서 내보냈다는 할머니 말에 코끝이 찡해온다. 이렇게 연세가 많고 힘이 없어보이고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살고 있다는 할머니 말에 아직 한번도 할머니의 큰아들을 보진 않았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스멀거려왔다. 가끔 집에 들리는 아들 내외는 홀로 계시는 어머님이 식사를 잘 해드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TV에서 상품광고를 하는 '햇살밥'을 몇 개 냉동실에 채워놓는단다.
그리고 차마 아까워 버리지 못한 음식들을 버리고 정리를 해주고 돌아간다는 아들내외가 마냥 고마운 듯 눈시울을 붉히시는 할머니....의료수준이 높아 고령화 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체 자식들의 강요에 의해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독거노인이 견뎌내야 할 외로움의 골이 깊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