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Story

니힐리즘((nihilism)

정순이 2003. 9. 14. 08:08
가게하고 있는 나는 추석 대목밑이라 추석날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퇴근시간이 자꾸만 늦어졌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종종걸음으로 퇴근길을 서둘렀다.
예년보다 느껴지는 체감경기가 바닥을 헤매고 있어서인지 예년에 비해
매상이 떨어진걸 느껴지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수 없어 언제라도 이런
시기가 오면 마음이 바빠지고, 몸은 긴장상태를 늦추지 않아진다.
그 이유로는 한해한해 다르게 나이가(?) 들어서인지 많은 일을 할려면 겁부터 나게되고 두려운 마음까지 앞선다.

전에는 이렇게 까지 두렵지 않았는데 말이다~
늘어진 어깨가 힘에 부친 듯 터벅터벅 걷고 있는 맞은편 사선으로 아는
사람이 지나가는게 보였다. 아마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는 행색을보니 나를 먼저 보고
피하는거 같았다. 나보다 열살이나 아래이지만 마음이 맞아 자주 가게에 들려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최근들어서는 부쩍 소원하게 지내던 터였다.
"정근이 엄마 어디갔다오는 길이야?"
미안한 듯 한 얼굴을 들어 소리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었고, 울은 듯 눈이 충혈되어 보였다.
"인제 퇴근해요? 대목이라서인지 퇴근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래. 어디 갔다 오는데?"
잠시 자리를 찾는걸 보니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았다. 앞서가던 남편이
오지 않는 나를 걱정할 것 같았지만 그녀를 뿌리치고 그냥갈순 없었다.
"친구하고 술한잔 하고 오는길이예요. 얼마전부터 한번
가게에 들러야지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말았어요.
그렇다고 전화로 아는 채 하기도 뭐하구 해서..."
"그래? 이 늦은 시간에...무슨일이 있나부지?"
"이사를 할려구요."
"이사는 왜...살고있는 집은 어떡하구?"
"집은 집달관들에게 다 넘어갔는걸요."
"무슨소리야?넘어가다니....그럼 아직도 남편이 도박을 하고 있단 말이야?"
"3년전 쯤의 일이 자꾸 터지는거 있죠.사채를 끌어드렸는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어떡해. 집까지 비워줄만큼 많은 액수였어?"
"말도 마세요. 집만 날라간게 아니라 집을 처분하고도 갚아줘야 할 빚이
자그만치 8천만원이나 되는걸요." 그말을 하면서 붉어진 눈자위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낸다.
"어떡하다가 이지경이 되었어.?"
"나도 모르겠어요. 꿈을 꾸는것만 같아요. 몇 년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라
대책이 서지 않아요. 처음에 빚을 졌다는 말을 하기에 그냥 말로만 따끔하게 충고하고 갚아
줬드니 또 많은 빚을지고 있었지 뭐예요. 사채를 끌어들였다가 그 이자에 이자가 불어
이렇게 된거 같아요."

"그런 돈은 빌리기가 쉬운가 보지?"
" 공무원 신분증만 내밀면 쉽게 돈을 빌려줘요."
그 녀가 언제인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은적이 있었다.
남편의 도박(일명 포카)으로 빚을 졌는데 언니께 4천만원을 빌렸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나는 그녀에게 말을 했었다.
'헤어지라고...' 그래야지 정신을 차린다고...다시 재결합을 할망정 가장으로서의
책무는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일이 있고난 지금은 그녀에게 차마 헤어지라는 말을 못했다.

이미 그녀의 남편의 봉급은 차압이 되어서 자신의 손에 쥘수 없는지경이고
집은 넘어갔으니 막바지에 다다른 그녀의 남편이 불쌍해보이여서이다.
"이혼을 할려고 법원에 갔었어요. 그런데 서류 하나가 빠졌다며 다시 해오라는
말을 듣고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는 다시 가지 않았어요. 나혼자서도
얼마든지 아들둘이를 키우며 살아갈수 있는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정근아....그래도 혼자 생각하기보다는 둘이서 마음을 맞추어 생각하면 더 힘이
생길꺼야.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마. 만약 정근이 엄마가 헤어지자고 한다면
남아있는 정근이 아버지는 어떻게 되겠어. 안봐도 뻔하잖아. 아마 폐인이 되고
말꺼야. 만약에 정근이 엄마가 남편이 그렇게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그렇지 않을꺼야. 부부가 몇 십 년을 등을 맞대고 살았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수 있겠어. 그러니 이혼할려는 생각은 접어."

"집은 이미 넘어가서 포기하고 산다지만 집을 처분하고도 남아있는 빚을 다
갚으려면 내가 버는 돈으로는 10년은 족히 걸려야 겨우 끝이 날거 같구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긴 세월이 흘러야 해요. 생각만 하면..."
말끝을 흐리며 깊은 한숨을 내 쉰다. 이 기막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속이 상해왔다. 남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아내들이 짊어져야할 짐이 너무 버거워보인다.

삐그덕거리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듯한 그녀의 힘든 삶에서 한줄기 빛이 서광이
비치길 빌어마지 않는다.

예쁘다고..미인이라고 복이 많은건 아닌가보다.
늘씬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남들에게 배려깊은 말을 곧잘 건네곤 하던 그녀가 요즘은 심한 우울증과 허무주의에 빠진듯 해보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선과 악 단순 이 분법의 프리즘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끈끈한 정에 연류되어진 부부와의 가느다란 끈 단선적인 한가지정으로 나눌수 없는 삶의 방식들로 묶여진 정서들이 단순한 이분법적의 프리즘으로 판단하기에는 많은 우여곡절인 삶들의 속살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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