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덫
우리는 흔히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 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라는 뉘앙스가 함축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언어의 덫에 걸리는 우를 범한다. 하긴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하고 난 뒤 만회할 기회의 여지는 많다. 그렇지만, 깊은 생채기 뒤의 사과는 당사자에게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걸 알수 있었다.
여러 생각에 함몰되고, 아전인수식 자기 생각에 갇혀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는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건 생각의 오류이고, 사회적 모순의 몽매함에 다름아니다. 부박한 삶의 부산물이고, 부조리지않는가. 관계와 관계의 맺음에서 이런 폐단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등거리(等距離) 우정을 잘 지켜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이다.
마음이 통한다고해서, 커뮤니케이션이 통한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 지내다보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이 내게 닥칠까봐 염려스러움이 자리하고 있다. 마음을 주었다가 상대가 마음을 돌려버리고 나면 그 상처는 오롯이 내몫이 되고 만다는데 대한 두려움 내지는 공황장애.... ‘사람만큼 간사한게 없다’ 라고 했든가? 나 역시 그 명제에 벗어나지 못할정도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키지는 못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격랑의 파고를 넘나든다는걸 알고 있다.
얼마 전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언어의 덫에 매몰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행동이라 현기증이 다 일었다. ‘만약 내가 그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어떤 행동으로 응대를 했을까’ 는 생각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술로 인해 한 행동이지만 이성을 잃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건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고 언어폭행에 다름아니다.
술로 인해 실수를 하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필름이 끊겼다’ 느니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부적절했던 행동들을 술기운탓으로 돌리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있음을 엿볼수 있고 평소 때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나는 생각이다. 나는 술 마시는걸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어 몇 잔 정도는 마시지만, 내 주량을 크게 벗어나면서까지 마신기억은 많지 않다. 그런 생각 바탕에는 술 마시고 난 후의 후유증에 고통받는게 싫어서이고,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리라.
‘술에 취해 하는 말들은 평소 자신의 생각을 술기운을 빌어 하는 경우가 많다‘ 는 말을 어느 애주가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실수를 술때문이였다며 합리화시키지만 참으로 몽매한 행동이 아닌가.
이글의 연장선에 어울릴 거 같은 내용을 네이버에서 발췌해왔다.
변증법 [辨證法, dialectic]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ē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