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미운정 고운정

정순이 2006. 11. 3. 11:42

지루한 가뭄 끝에 내린 가을단비로 추위가 시작될려나했드니 아직 반소매의 윗도리를 입어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수은주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날들의 연속이다.


“요즘 남편을 보면 그렇게 애처러워보일수가 없는거 있지?” 비슷한 연배인 사회친구가 자리에 앉자말자 그렇게 서두를 꺼냈다. “무슨 말이야?” "너는 그렇지 않든?“ 하긴 나도 요즘 남편을 볼때마다 안Tm러운 마음이다, 신혼초부터 몇 년 전까지만해도 아무리 부부싸움을 해도 항상 남편은 당당한 태도로 초지일관(?)했다.  몇 달 전, 불콰한 얼굴로 퇴근한 남편으로부터 알코올성 간염수치가 너무 높다는 사실을 들었을때만해도  마음이 이렇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남편이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가 없다. 거실에 있던 MP3 오디오를 큰방 문갑위에 올려놓고 잔잔한 음색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남편의 마음이 읽혀지고, 나와 사소한 의견대립으로 컴퓨터를 켜놓고도 익스플로어를 띄우지 않고 바탕화면에 있는 이미지만 응시하고 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짠해질수가 없었다.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감정들이 파스텔화되어 다가온다. 남편이 유약해보이기도하고, 심약해보이기도하구.....


남편은 항상 자신을  ”나는 꺾이면 꺾였지, 휘어지지는 않는다.“ 고 목소리에 힘을 주곤 했었다. 그렇게 대나무 같이 꼿꼿하던 남편이 요즘에 들어서는 ”남자들은 우리들 나이되면 다 그런 생각이 들지...“ 무슨 이야기 끝에 그런말이 나오게 되었지만, 남자 나이 50대가 되면 남자들도 외로움을 탄다는 것이다. 남편의 말을 나름데로 추론해보면 남편도 그렇지 않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난 남편과 25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남편이 외로움을 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남편은 항상 큰소리치며 당당하게 살았다.

 

경상도 남자의 투박함과 강한 이미지가 남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고집불통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남편곁을 따라다녔지만, 그래도 마음이 짠하는건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그런 며칠 전 설겆이를 하고 있는 등 뒤에서 "나 있지? 니가 참 좋거든..." 하는데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는지...화들짝 웃고 말았다. 순간 무안해진 남편이 정색을 하며  "다시는 이런말 안할끼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놀란 내가 등을 돌리며 남편을 달랬다. "미안해, 미안해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서...." 남편의 애정표현을 멋적게 만들었지만, 25년 을 살아오면서 남편의 마음을 읽어내기에는 모자란 세월은 아니다.  술기운을 빌어 나온 반응이였지만, 분명 듣기 좋은 말이다.


 

나이가 사람을 철들게 한다고 했든가? 막내로 자라 늘 어리광만 부리며 살았던 내가 남편의 모습이 달리 보이는 걸 보면 철이 들긴 들었나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녹음(綠陰)이 우거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나목으로 남듯이, 우리들의 삶도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삶의 궤도를 지나오면서 육탈한 몰골로 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악처로 소문난 크산디페를 두고도 ‘악처 하나가 효자보다 낫다 ’고 일갈했듯이, 아무리 효자인 자식이 있어도 늘그막에서는 등 긁어줄 배우자, 얼굴 맞대고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배우자가 더 낫다는 뉘앙스이리라.  배우자를 사별하고 홀로 남겨진 사람과 이혼하고 혼자 있는 사람에게 여론조사를 한 걸 본적이 있다. 이혼한 사람보다 사별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패닉현상을 보인다고했다.  이혼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정이 사라지고 난 후 내린 결정이라 조금은 담담하겠지만, 사별하고 남은 배우자들은 갑작스런 변화에 즉응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고지식한 측면이 없지 않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될지를 계산하기보다 그냥 자기 주장을 드러내는 정공법을 쓰는 남편..그래도 밉지 않은 건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이제 50언저리에서 삶의 궤적들을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져볼련다. 서로 반목하고 자존심 내세웠던 지난 삶들, 남은 시간들은 사랑하는 날들로 윤색하고 각색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