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친정아버지의 17번 째 기일

정순이 2006. 5. 21. 14:53
 

“아니 이시간에 어쩐 일이야?” 이른 아침에 가게안으로 들어서는 막내올케를 보면서 반색을 하며 가게에 들린 용건을 물었다.“시아버지 제사에 갈려구...”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고나할까. 하여간 친정아버지 기일이 다 되어간다는 말은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나서 친정아버지 기일이겠거니 생각하며 “좋겠네?” “그럼 좋지. 근데 몇 시쯤에 갈건데?” 무슨소리하냐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막내올케를 바라봤다. “오늘 아버님 기일이잖아. 그래서 몇 시에 갈꺼냐구 ?”


아뿔싸....잊어버리지 않는다며, 기억할수 있다며 달력에 표시조차 해두지 않은 나의 실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세, 언니는 몇시에 갈 생각이야?”작년까지만해도 집에서 5분 거리에 친정이 있어 시간에 구애받지않고 늦은 시각 친정에 잠시 다녀오면 되곤했었다. 그런데 형제들의 염려속에 친정 부모님제사와 큰오빠의 제사를 큰 올케의 큰 며느리가 살고 있는 김해로 가져갔다. 물론 큰 올케의 힘듦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조카며느리의 움직임이 힘들다는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부산에서 위성시인 김해라는 지역적인 거리감도 한 이유겠지만, 우리 부모님 제사를 손자며느리가 지내려고 가져갔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큰 올케가 버젓이 살아있고,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며느리들이 시어머니(큰올케)가 계시는 집으로 와서 제수음식을 다 장만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미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우리집으로 시집온 큰올케는 엄마와 진배없었고, 내가 살아온 과정을 다 알고 있다. 큰 올케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 친정모친인 엄마와 큰올케와 고부간의 관계는 그리 녹녹치만은 않았었는데, 지금의 며느리들에게는 아주 잘 대해준다. 한번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않을 정도로 며느리들에게 잘한다. 물론 서로 잘 지낸다면야 그것만큼 보기 좋은게 어디있겠는가. 다만 우리 친정엄마한테도 그렇게 잘했더라면 고부간의 갈등은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큰올케와 조카며느리들이 주고받는 눈길을 대할때마다  친정엄마 얼굴이 중첩되어온다.  주변에서 고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며느리가 조금만 더 잘하면 고부갈등은 치유될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연전인가? 조카손자 돌잔치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조카들에게도 그랬다. “ 너거들 엄마한테 잘해드려야한다. 너거 엄마 성격 보통은 넘는다는거 너들도 다 알끼다. 그런데도 그 성격 다 접어두고 너거들한테 그렇게 잘하는 거 보면 정말 대단하다아이가.... 그러니 항상 시어머니를 잘 모셔야한다.” 돌잔치 자리에서 마신 술이 취기가 가시지 않은중에 한 말이였지만, 진심이었다.  막내올케와 나는 늦은 시각에 버스를 타고 또 다시 환승을 한 다음 제사를 지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멀미로 두통이 심했고, 막내올케는 구토까지 한 모양이다. 그러니 버스에 내렸어도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많지않은 형제 중 돌아가신 분이 두사람이나 되니 제사집이라고는 하나 썰렁하다.


11시 30분이 되자 큰올케는 “ 자시만 지나면, 제사를 지내도 된대, 그 전에 지내는 제사는 귀신이 와서 먹지를 않는데...” 일전에는 꼭 12시를 고집하드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다니던 사찰에서 그런말을 해준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효율적인거 같다. 다들 직장생활에 바쁜 몸들이니 조금 일찍 제사를 지낸다면 그 만큼의 시간은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데 요긴하게 쓰지않겠는가. 조금 이른 시각에 제사를 지내고 제수상에 차려져 있는 음식을 교자상으로 옮기고 다들 둘러앉았다. 음복을 하기 위해서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서야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누가 먼저 서두를 꺼냈는지 기억에  남아있진 않지만, 나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들을 다 쏟아내고야 말았다. 큰조카며느리도 매사에 똑 뿌러지게 자신의 일은 잘 하지만, 인사성이 밝지 않아 불만을 갖고 있던 사실을 이야기했고, 제사를 가져오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과, 그래도 엄연히 시어머님인 올케가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며 얽혀있던 감정을 쏟아냈다. 그래도 조카며느리가 기특한건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합쳐버리면 어떻겠냐는 의견에 “민석이 아버지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못을 박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구요.” 라는 말에 그동안 조카며느리에 대해 갖고 있었던 조금은 나쁜 선입감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