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수은주의 눈금이 매일 격랑의 파고를 넘나든다. 며칠 전 만하더라도 여름같은 날씨로인해 짧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들이 종종 눈에 뜨였는데, 어제는 바람이 심하게 불기도 했지만 온도도 꽤 많이 떨어진 듯 벗어두었던 카디건을 꺼내 셔츠 위에 걸쳐야 할만큼 추웠다.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는 몇 십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어머님도 연전에 돌아가셨으니 어버이날이 주는 어감은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 화원 앞을 지날 때 상점앞 프라스틱 화분 받침대위로 수북히 쌓여있는 카네이션 화분들도 내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않을 만큼 의미가 퇴색되었다. 민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카네이션을 처음 받았었다.
학교에서 학과시간에 만들어 가슴에 달아주곤 했었다. 연치가 높으신 분들이 달고 다니시는건 자연스러워 보이는 데 젊은 사람인 내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기에는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공연한 데 돈을 투자하지 말라고, 민구에게 다짐을 줬었다. 나의 다짐이 효과가 미약했는지 어버이날이 될 때마다 카네이션을 갖고 왔다. 민규가 어릴 땐 조화였던 카네이션이 횟수가 지날 수록 생화로 변하면서 어버이날의 변천사를 이어왔다.
그나마 민규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종종 책도 사다주기도 했었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머플러도 목에 둘러주곤 했던 정많은 아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동아줄 끊어지듯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부터는 자신에게 할당된 용돈이 항상 모자란다고 투덜되는 편이니 달라진 아들의 태도에 ‘서운하다’고 말한다는거도 지나친 요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는다.
그런 오늘 하루에도 서너 번씩은 가게에 들리는 팔순의 할머니에게 시어머니 대신 친정부모님 대신 돈을 좀 드리기로 했다. 엊그제부터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다니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서 점심이나 한끼 사드릴까 생각하다가 액수는 많지 않지만, 돈을 드리는 게 할머니를 위해서도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니 흔쾌히 찬성을 한다.
할머니는 매일 병원에를 다니신다. 당뇨수치도 높아 당뇨약과, 요통이 심해 병소부위에 주사도 맞아야 한다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노인병원에 다니신다. 박봉을 받는 셋째 아들과 그마저도 없는 둘째 아들과 같이 곤궁한 삶을 이어가신다. 빈익빈 부익부라고 했든가, 한번 무너지고 난 큰 아들의 사업은 좀체로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했지만, 그마저 여의치않아 그분의 삶이 안쓰러워 보이기만한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식을 위해 다 투자했던 할머니의 섣부른 판단에 이렇게 고달픈 노후가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오늘만이라도 즐거운 하루가 되는데 작으나마 일조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하루라도 빨리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 만면에 행복하고 여유있는 웃음이 가득하길 소원한다.
[추신]마침 고기를 사러 들리신 할머니는 " 둘째 아들이 어버이 날이라고 용돈을 5만원이나 주네." 하얀 편지 봉투를 내미는 날 빤히 쳐다본다. "이게 뭐유?" 눈치를 못챘을리 없지만, 물어보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한테서 받는 미안함이 숨어 있었을테다. "할마니 쓰시라구요. 남편도 할머니께 드린다고 하니 아주 좋아하든걸요." 라는 나의 말에 그동안 남편을 결코 좋은 이미지로만 보이지 않았었는데 내 말을 듣자 그제서야 못이기는척 받으셨다. "요즘 장사도 안된담서 내게 줄게 어딨어요?"
믿망스러운 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신다. 집으로 가시드니 얼마있지 않아 손에 검은 비닐을 들고 다시 가게에 들리신 할머니 "이거 영감님 드리슈, 소주를 좀 사왔어요." "이런걸 뭐하러 사오세요?" 비닐을 펼쳐보니 소주가 5섯 병이나 들어있다. "안주는 이집에 많이 있으니 소주만 사갖고 왔수" 다시 얼마있지 않아 할머니는 또 노란 비닐안에 탐스런 참외가 잔뜩 들어있다. " 영감님 깎아드리슈" "나중에요. 술안주로 깎아주죠 머." "지금 깎아드리슈?" 고집을 부리시는 할머니 앞에서 참외를 깎아야만했다. 지금 먹지 않을것임을 알면서도... ^^
저녁늦게 집에온 아들의 손에는 꽃바구니와 작은 롤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나란히 앉게 한다음 큰절을 한다. "아버지, 어머니 절 이렇게 키워주신거 감사드립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