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
“조금 전 부산은행에서 삼촌 앞으로 5만원 송금했으니 나중에 밥이나 한끼해라” 고객주문에 고기를 썰고 있으니 가게앞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울대를 자극하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전화통화내용만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데, 멀리 떨어져 있는 동서라 만날 수 없어 생일선물을 본인에게 직접 전달해주지 못하게되었으니 돈이라도 대신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듯했다.거리가 멀어 만날 수 없으니 자신의 마음을 달리 전달할 방법이 없었을테고, 대안으로 돈이라도 보내 동서의 생일을 축하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엿보여 괜찮은 발상이긴 하지만, 돈이라면 최고라는 세태의 흐름에 발빠르게 동참하려는 그 여성의 행동이 웬지 삭막하게만 느껴지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웃자고 한 말이였겠지만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예식장 하객으로 참석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축의금만이라도 송금해주면 좋겠다“ 는 어느 예비신랑의 익살스런 농담에 씁쓸했었던 여운이 그 여성의 전화통화를 듣게되면서 중첩되어왔다. 화폐의 위력앞에 자존심마저 맥없이 무너지고마는 젊은 사람들의 영악한 발상에 아연실색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은 참 순수했던거 같다. 그런 당돌한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그저 부모의 생각에 순응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이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손때가 묻은 유서깊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집안 뒷곁 채마밭에 심어놓은 푸성귀라도 이웃과 나누먹고 싶어 했던 순수했던 마음. 돈을 앞세우기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정을 주고받았던 우리세대 문화와는 달리 요즘 20대들은 나밖에 모르는 에고이즘들이 많아 인간의 정을 느낄수 없고, 사이보그처럼 느껴질때가 간혹 있어 그럴 때는 섬뜩해지기까지한다.
옆에 서있던 고객도 같은 내용을 듣고 있다가 우스웠든지 ”요즘은 시부모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데요. 자신의 생일 날 며느리나 아들이 집으로 찾아오기보다 돈을 부쳐주는게 더 마음편하고 자신이 사고 싶은 물품을 살수 없어 더 좋아하신데요. 며느리도 오랜만에 시댁에 와서 음식을 장만할려니 모든게 서툴러 당황하게 되니 자연히 일거리는 시어머님의 몫으로 돌아가고 시어머니 역시 며느리가 손님같은 생각이 들어 자신이 다 해버리는 게 더 속이 편하다는거죠. 그런 생각이 바탕되어있으니 시부모 생일 때 며느리가 온다는 것도 달갑지만은 않은가봐요. 만난다는 게 서로에게 불편만 초래하게 되니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일순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나 역시 신혼 시절, 시댁에 가는 게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시댁의 남자 형제들은 다 효자들이다. 형제들의 생각을 공유하며 일탈하고 싶지 않았던 아들인 남편은 집에서는 대충 옷을 입고 있어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시댁에 갈때는 항상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 입고 가라고 어드바이스 하곤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아픈 기억이 스멀거린다. 결혼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다. 15분 거리에 있는 시댁에 일주일 동안을 아첨 저녁으로 꿀물을 타서 문안인사를 다녔었다. 3일 째 접어드는 날로 기억된다. 하루는 저녁을 짓기위해 집으로 갔다 일을 마치고 남편이 올 시간이 남아있어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이 든거 까진 좋았는 데 그 다음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때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연탄을 난방으로 사용하는 가정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잠을 자면서 연탄가스를 마신모양이다. 나는 몸을 못 가눌정도로 실신 해 있었으니 남편의 퇴근을 알 리가 없었다. 대문밖에서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담튀기를 하고 집안에 들어와 보니 마누라인 내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본 남편은 울화가 치밀었으리라.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연탄가스에 중독이 된 내 몸은 늘어진 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 생각에는 아내인 내가 가스중독이기보다는 시댁에 문안인사를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바탕 되어있었으니 화가 난건 당연했을 테다. 자신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었단 남편은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내오른팔을 남편의 어깨에 둘러메고 가까운 (가깝다고는 하나 15분거리였음) 병원 응급실에 들렀다. 의사의 소견(가스중독) 이 나오고나서야 남편은 아내에게 가졌던 오해를 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수액한병을 다맞고 시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으니 그 서운함이야 오죽했겠는다. 시댁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였고, 힘든건 나만이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상태로 시어머님깨 절을 드렸으니말이다.
요즘같은 며느리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남편이 있다면 당장 이혼감이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나와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하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게된다. 가스중독으로 쓰러진 아내인 나보다 엄마의 문안인사에 더 무게중심이 쏠려있었던 남편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는 암울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때의 암담함... 만약 지금이 그 상태가 되었더라면 나의 태도는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