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견문을 읽고
봄이 가져다주는 따스함의 계절이라서 그런지 요즘 마음이 자꾸만 밖으로 일탈하려고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거리곤한다. 봄의 정령인 개나리와 진달래, 버들강아지가 몽우리를 터뜨렸다는 소식에 마음은 어느 새 타임머신을 타고 유년시절로 돌아가보고 싶어진다. 사람도 이럴진데 한갓 동물에 지나지 않는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말(首丘初心)이 나온모양이다. 고향에 가봐야 별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항상 어릴 적 고향생각을 잊지 못한다. 봄은 짓궂다, 그냥 앉아 있지 말라고 일탈을 충동질한다.'겨울은 끝났다.'라고 마침표를 찍기에는 모호한 경계의 시간, 그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속엔 어느 새 냉랭하고 싸늘함 대신 얼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빗장을 열게 하는 따스함이 있다.
(퍼온글)역사에 대해서는 일천한 내가 우리나라 역사도 잘 모르면서 외국인이 지은 책을 사보게 된다는 건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서 이번에 어느 일간지 섹션에 소개된 ‘서유견문’을 구입했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1856년 서울에서 유진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개화파 영수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아 해외 사정에 일찌감치 눈떴다. 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일본을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한국 최초로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28살 때 통리교섭통상무아문의 주사로 임명,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가서 한국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귀국하여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1887년에서 1889년 사이에 이 책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탈고 되었지만 유길준이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공직에 복귀한 후에야 비로소 출간이 되었다. 유길준은 1894년 일본에 보빙사 사절로 갔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책의 출판을 의뢰했다. 서유견문은 그 다음해인 1895년 4월 25일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교순사라는 출판사에서 전체 574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장본으로 1천 권이 출간되었고,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자 일본으로 망명, 11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흥사단과 융희학교를 설립했고, 노동야학회 고문, 국채보상금처리회장으로 활동했다. 59세때 노량진 조호정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말 정치가이자 사상가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얼핏 서양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 보고 들은 것 외에도 다양한 서적을 토대로 서양 문물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유길준은 서양의 정치와 제도, 법률, 종교, 학문, 풍속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각에서 서구 문명의 ‘번역’을 시도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서양 견문록이 아니라 입이 벌어질 만큼 방대한 스케일로 서양 근대 문물을 집대성한 당대 최고 수준의 “서양 입문서”이자 서양문화 소개서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갖는 더 큰 중요성은 서양문화 소개서 이상의 책이라는 데 있다. 유길준은 우리가 서양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몰라서는 안 되겠기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서구 문명을 우리나라 근대화의 모델로 제시하였다. 실제로 유길준은 1890년, 4년간 집필한 [서유견문]의 초고를 고종에게 바쳤는데, 이는 선비가 시무책을 임금에게 바치듯이 자신의 개혁 구상을 펼쳐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견문]은 국가, 국민, 정치, 교육, 법률,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수용한 책이며, 개화사상을 집대성하고 개혁 구상을 집약한 사상서로 평가된다. 그리고 유길준의 개혁적 사고는 이 책이 최초의 국한문혼용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이라는 점. 유길준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얻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을 국한문 혼용체로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글을 우리 글자라고 밝히고 있어 파격적인 사상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서유견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서양의 모든 것에 대한 지적 열망’과 ‘조선 사회 전체의 개화’이다. 새로운 문명과 사회를 향한 열망은 이 책에서 서구 문화 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백과사전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서문과 비고를 제외한 총 20편으로 이뤄져 있다. 제1편~제2편은 천문과 세계지리, 제3편~제18편은 정치 제도, 사법, 교육, 사회보장 제도, 공공기관, 종교와 학문, 풍속, 기계와 발명품, 제19편~제20편은 서양의 도시를 다룬다. 이와 같이 광대한 분야에 걸쳐 서양을 말하고 있지만 그가 특별한 주목한 서양 문화의 핵심은 정치와 제도, 법률이다. 그는 조선의 개화, 즉 근대화 실현을 위해서는 근대적인 국가와 국민을 만드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 책은 정치학 교과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출간 당시에 [서유견문]은 많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895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도쿄의 교순사에서 전체 574쪽에 달하는 거대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는데, [독립신문]에서는 유길준이 사용한 ‘개화의 주인’이라는 용어를 썼으며, [황성신문]에서는 [개화의 등급]을 발췌해 싣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책에서 유길준은 겉모양만을 따르는 비주체적인 개화는 한낱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한낱 개화의 병신”이라고 따끔하게 경고한다. 또한 “고금을 통틀어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보든지 간에 개화가 지극한 경지에까지 이른 나라는 없었다”고 밝힘으로서 서구의 근대성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구 문물의 맹목적인 수용을 경계한 유길준의 사상은 무분별하게 서구 문물을 수용해 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우리가 취해야 할 개방? 개혁의 자세와 방법을 이 책에서 예견하고 있다. 보수주의인가, 급진주의인가. 유길준의 사상은 보수주의라는 평가에서 급진주의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이다. 유길준은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안락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조선의 개혁에 생을 바쳤다.
그는 당시 가장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외국 문물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학 생활 중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동경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에드워드 모스에게 지도를 받으며 영향을 받았다. 사실 유길준이 유학생 신분으로 후쿠자와의 집에 기거하면서 지도를 받을 때부터 이 책에는 한계성이 예정되었다. 자유민권사상가였던 후쿠자와는 1870년대에 대외침략론자로 탈바꿈했다.
유길준은 친일파 노릇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독립운동에 활발히 뛰어들지도 않았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개항을 계기로 외세의 압력이 심해지던 시기에 [서유견문]을 집필한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자신이 경험한 서양을 조선에 전달하려고 애쓴 산물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유견문] 외에도 [이태리 독립전사] 등의 번역서도 출간했으며, 최초의 근대 문법서 [대한문전], 최초의 근대 정치학 개론서 [정치학](미완성 초고) 등 정치, 외교, 법률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말년에는 관직을 거부하고 교육·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서유견문’은 기행문에 속하나 집필 형식은 여행기, 견문기라기보다는 일종의 개화 소개서라고 볼 수 있는 교본이다. 이 책은 20편으로 구성돼 있다. 제1편부터 18편까지는 세계 지리와 서양문물의 소개로 일관돼 있다. 제19편과 20편은 미국과 유럽 대도시의 소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시도됐던 견문에 따른 자신의 생각을 피력해 나가는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기행문 형식도 아니다.
기행문은 대개의 경우 출발에서 귀환까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본대로 느낀대로를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테마기행의 경우에도 견문에 있어서 시간성과 공간성에 따른 체험과 느낌을 강조하고 현장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서유견문’은 `서양사정’을 바탕으로 하고 여러 책을 참고하여 정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개화 교본에 가까운 책이다. 문학적 의의보다는 개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서양 견문기라 할 수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우리 나라 초유의 서양 견문록인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끌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나라 밖 사정에 어두웠던 백성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 문화와 삶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서유견문’에서 유길준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서양의 문화와 제도, 삶의 양식 등 방대한 부분에 이르고 있다.
제1편과 2편은 세계의 산, 바다, 강, 호수, 인종, 물산 등 인문 지리적인 개론이고, 제3편과 4편은 `나라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등 개화파로서의 의견을 밝힌 계도적인 글들로 구성돼 있다. 서양의 문물, 제도, 교육, 정치 형태, 정부의 직분, 세금, 군대, 화폐, 법률, 경찰 제도, 건강법, 서양 학문, 종교, 관혼상제, 놀이, 시설, 문명기기 등이 망라돼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엔 서양 여러 대도시의 견문이 포함돼 있다. 제19편과 20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등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기록이다. 유길준은 1880년대에 한국인으로서 서양 여러 나라 대도시들을 여행한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가벼운 여행기가 아닌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우리 나라에 소개함으로써 `개화’를 앞당기자는 시대적인 사명감을 갖고 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