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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

정순이 2004. 3. 29. 12:54

시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간병으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고 난후 부터는 무슨일을 하고나면 맥을 못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럴꺼라고 위안을 할려다가 일단 한의원에 들러보기로 했다.시어머님 장례를 치르고 난 지난 토요일날 지인이 한의원을 하고 있는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벌써 건물을 지은지 2년이 넘었지만 풍수지리설로 입주를 하면 안 좋은일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아직 입주를 하지 않은 지라 휴대전화로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약속한 시간이 오늘이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게 의사선생님이 한의원 문을 열어두겠다는 말을 기억하며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의원에 들르니 약속한 시간보다 좀 일렀었고, 사모님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 입주하진 않았지만 새로지어진 건물이라 눈이 부시도록 깨끗한 내벽과 주위에 마음마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주위를 둘러보니 넓은 책상위로 컴퓨터 한 대가 썰렁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면서요?" 자리에 앉기바쁘게 시어머님의 사망소식을 확인했다. "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요." "왜 시댁에는 등을 달지 않았어요? 너무 서운하잖아요." 눈주위가 불그스럼하게 이슬이 맺히는거 같드니 이내 눈물을 떨군다. 어저께야 소식 들었어요. 옛날 시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우리 양반하고 아주 친하게 지냈거든요. 커피를 마시러 가실 때 라든가 어디 가시는 일이 있을때도 꼭 같이 다니시곤 해 남들이 단짝이라는 말로 시샘어린 눈총을 받곤 했었어요. 시어머님도 경우가 아주 발라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곤 했는데 너무 서운해요. 왜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연락하지 않았어요? 다들 삼우제를 지내고 난후에 소식을 들었는지 서운해 하던걸요. 시댁 문앞에 등이라도 달아놓으면 알수 있을 텐데...."

 

"큰 동서도 어머님 친구분께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더라구요. 다른 시숙님들은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연락을 하자는 말이 있었긴 했지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큰동서 친정에도 연락하지 않았는걸요." "큰 동서 생각에는 재작년때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며 남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모양이죠." "아마 그랬을 꺼예요." 의사선생님은 약속시간이 지나고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해진 약속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린다는건 서운함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특히 나같이 가게를 하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출근시간에 한의원에 들리고 난 뒤 가게에 출근하겠다는 말을 남편에게 미리 귀띔을 하지 않아 더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5mm의 두꺼운 유리문을 밀치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댁 아들인 것 같았다. 엄마께 열쇠를 받아들고 이층으로 연결지어진 쪽문을 밀치고 올라가는 뒷모습이 망막에 들어온다. 이윽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에 눈길은 자연히 문쪽으로 향했으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의사선생님의 모습은 아니다. 다시 육중한 문을 밀치고 한사람이 병원안으로 들어온다. 의사선생님이였다. 자리에 앉으니 따끈한 녹차를 내어오며 내 놓는다. "한잔 드세요." 그댁의 사모님은 연세가 꽤 되신데도 불구하고 나이어린 내게 항상 깍뜻한 말로 존대어를 붙인다. 조용한 목소리와 꾸미지 않는 외양으로 남들을 제압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선생님 아시죠? 영광 사진관 넷째 며느리예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힐끗 올려다본다. 작은 체구와 벗겨진 이마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댁의 남편은 일찍 돌아가셨다. 남편이 돌아가시자 비어진 공백을 메꾸기 위해 들어오신 의사선생님이다.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는 그 배경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라는것과 확인되지 않은 억측스런 소문들이 꼬리를 물곤 했지만 다들 지나간 이야기들이다. 의사 선생님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라는 것과 남편이 돌아가시고 난후 미망인이라는 홀가분함이 그들을 결속하게 만들었다해도 남들이 흔히 말하는 불륜은 아니지 않은가...'로멘스그레이....' 그 표현이 더 적당할 듯하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요즘 자꾸만 몸이 피곤해서요. 어제 아침같은 경우에도 집안 청소를 두어시간 하고 나니 맥을 못추겠는걸요." 긴 장방형 상자안을 들여다보시드니 청진기를 꺼낸다. 혈압을 체크하기 위해서다. "얼마나 나왔어요? 저혈압이예요?" 거듭되는 나의 질문에 "90에 70입니다. 저혈압은 아니예요." "일전에 병원에 들렀을 때 혈압을 재어보았을 때는 90에 60이였어요." "그럼 변동이 없는거네요. 갑자기 수치가 차이가 많이 나면 걱정을 해야하지만 지금상태로는 걱정할 단계까지는 아닙니다.

 

혈압수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면 올라갈수 있거든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후에 경황이 없어서일겁니다." "혈압이 낮으면 짠 음식을 먹으라는 말을 하던데 정말 그래요?" "아니예요. 혈압이 낮다고 해서 짠음식은 먹는다고해서 혈압수치가 올라가진 않아요. 일반적으로 생각할때 혈압이 낮으면 짠 음식을 먹으면 올라갈꺼라는 생각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혈압이 낮거나 높아도 짓는 약의 성분은 똑같아요." 그래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짠음식은 피하는게 좋아요. 그리고 속이 찬 것 같으니 항상 따뜻한 음식을 드시구요." "네.. 속이 찬걸로 인해서 오는 증세가 다양한가보죠?" "그럼요. 속이 찬걸로 해서 오는 증세로는 심장이 안좋고 혈액순환기능이 떨어져요." "그래서 손이 잘 저린가 보죠?"

 

"그럼요. 손도 저리세요? 밤에 심하세요? 아님 낮에 더 심하세요?" "낮이예요." 당의 수치를 재기 위해서 가운데 손가락 끝에 볼펜 같은 걸로 살짝 찔렀다. 피가 나오지 않자 양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운데 손가락 끝에 힘을 가하니 빨간 선홍빛 피가 몽글거리며 나온다. 처음 해보는 혈당검사..."어때요?" "혈당은 정상이예요" 두어가지 간단한 검사와 의사선생님의 문진시간은 끝이났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사모님이 말을 건낸다. " 차 드세요." 비로소 설록차 한모금을 입으로 가져가며 빨리 갈 욕심으로 서너번에 걸쳐 후루룩 마시고 사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유리문을 밀치고 나왔다. 가게에 들리니 남편 입이 부루퉁하다. 출근시간이 늦음에 대한 반응이리라. 집으로 가던 길을 되돌아오며 일갈한다. "밥하지 마라...."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게되는 단식투쟁의 서막이 그렇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