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딜레마
"나도 아들 결혼시키고나면, 그아주머니처럼 되지나 않을려는지 걱정이네..." "무슨말이에요?" "병문안 갔다왔거든요. "누가
아프나요?" "모르세요? 미꾸라지 팔던 아주머니가 다시 입원했는 데..." "그래요? 난 전혀 몰랐어요. 며칠 전 퇴근길에 만났어요. 약봉투를
손에들고 힘없이 지나가던걸요. '얼굴이 부었네요' 라고 말을 건네니 "지금은 많이 빠진거예요." 하던걸요. 다시 입원 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말도 마세요, 아는 사람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기에 예식장에 들렀다가 겸사겸사해서 병원에 한번 들러보았죠. 말이 병문안이지, 시간 한번 내기가
어디 쉽던가요? 그래서 바깥에 나간김에 들러본거에요. 우리가 병실에 가보니 퉁퉁부은 얼굴을 하고 병상에 누워있더라구요. 우리들이
가니까 얼마나 반가워하는 지....서로 가게를 하면서 자주 만났는 데도 병원에서 만나니 반가웠던 모양이에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처해진 상황이야기를 하는 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말을 듣고 얼마나 눈물이 나는 지......"그때의 상황이
오버랩되어오는지 말끝을 흐린다. " 유방암인가봐요. 본인은 자신의 병이 심각한줄 모르는 모양이든데 그 아들 말로는 아주 심각한가 보더라구요.
오늘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는 데..... 결과가 잘 나와야 할텐데...." "그렇게 심각한가보죠?" "지난 번 백내장 수술하고 난 후유증인지
몰라도 시력이 떨어져서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나 봐요. 그런데다가 귀도 먹먹하다는거 있죠?" "그렇게 심해요?"
"그러니까 5월8일이 어버이 날이잖아요. 어린이 날 때 큰며느리가 시어머니보러 시댁에 들렀던가 봐요. 몇번의 입원과 퇴원으로 아무래도 장사를 못할 것 같아서 큰며느리한테 그랬대요.' 인제 가게를 못하게 되었으니 생활비조로 매달 30만원을 달라구요.' 그랬드니 며느리가 얼굴을 치켜들고 악다구를 쏟아냈다지 머에요. '아니 어머니 저만 자식이에요? 둘째도 있는 데 왜 내게만 그렇게 많은 액수를 생활비로 달라고 하세요?' 라구요. 그래서 그랬나봐요. '아무려면 너한테만 그렇게 부담을 지우겠니? 둘째네도 이미 이야기했다.' 라구요. 그말을 듣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을 나가버리고 난 후 자신이 입원해있어도 들여다 보지도 않더라는 거 있죠? 그래도 마음이 캥겼는지 어린이날에 와서는 30만원을 내놓았다는군요." 부모도 재력이 있어야 자식들한테도 대우받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능력없는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나오는 큰며리의 태도는 못마땅하다.
정해진 남편 봉급에 자식공부시키랴, 한달 동안 생활하랴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큰며느리의 태도에 다들 망연자실 하며 속울음을 삼켰다. 그러나 남편의 박봉에 자신도 힘들게 사는 데 왜 그건 생각해주지 않느냐는 며느리의 속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시어머니가 야속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며느리의 항변은 그럴수도 있다며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옛부터 '한부모는 열자식은 키울수 있지만, 열자식은 한부모 모시기는 어렵다' 는 경구처럼 힘이없고 능력없는 그분을 자식들이 외면한다면 시부모들의 딜레마는 헤어나기 어렵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태의 흐름에 노인들의 입지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 며느리역시 이런저런 계산을 했을터이다. 아직 시어머니 나이가 젊으시니 돌아가실 때까지 적지않은 생활비를 남편의 봉급에서 충당해야한다면 앞일이 까마득 하다는 생각도 했을 터이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태도로 나왔어야 하느냐' 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음은 아직까지 우리삶이 삭막하지는 않다는 방증아닌가. 둘째 며느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큰며느리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봉급으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매몰차게 내뱉는 악다구에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을터이다.
우리 가게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분의 생의 일부분이었던 삶터가 있다. 크다란 함지박에 서너 가지 의 물고기를 담아 파는 곳이 있다. 산후 조리에 좋다는 가물치며 추어탕을 끓이는 데 들어가는 원재료인 미꾸라지, 약해진 몸에 보신용으로는 그만인 장어...수입산인지 어떻게 아느냐 는 손님들의 앙다구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국내산 물고기만 판매한다는 걸 알고 있다. 세월의 부침에 의해 많은 값싼 수입산에 밀려 내리막길을 걸은지 오래되었지만, 한번 시작한 업이라 또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쉽게 업종전환을 하지못하고 세월의 강태공을 낚고 있다. '효자 자식보다 악처가 낫다고 했든가?'
어느듯 자식들은 다 성장해 분가를 시키고 막내 딸 하나만 여위면 자신의 책무는 다하는거라며 노후설계를 하던 그 부부들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암운의 그림자는 남편되는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부터다. 갑작스런 입원과 함께 곧장 퇴원하겠거니 했던 게 입원, 퇴원을 몇번 반복하드니 끝내 자리를 틀고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고 나서부터 아내의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의지하던 남편이 옆에 없으니 그허전함인들 오죽했겠는가. 남편이 살아있을때도 병원에 입원해 수술한 전력이 있는데다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이 의지했던 남편이 옆에 없으니 미구에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한달에 한번 씩 개최해 즐거운 시간을 갖는 시장상우회에도 불참하는 횟수가 늘어나드니 급기야 작년에는 탈퇴 하고 말았다. 한달에 한번 씩이라도 여러사람들과 커뮤니티를 나누면 팍팍한 삶이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는 데 말이다.
가게를 하면서 자주 접하는 게 혼자사신다는 분들이 꽤 보인다. 같은 집에 살다가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며느리가 이사를 가버리고 난 이후
명절때도 시어머니를 찾지않고 연락조차 끊어버렸다는 어느 할머니, 아무리 맏이라도 혼자서 시부모를 모시지는 못하겠다며 둘째, 셋째 아들집으로
전전하시다 결국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 며느리의 직장으로 인해 가정살림을 도맡아 하신다는 90세의 노파, 손자 공부 때문에 뒷바라지를 해주러
정착했다가 손자가 결혼과함께 이사를 가버리고 난 후 혼자남게 되었다는 80세 할머니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사는 독거노인분들이 꽤
계신다. "얼른 죽어야 할텐데" 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시는 그분들이 사회복지시스템의 원할한 작동으로 마음고생없는 노후를, 자살충돌의 노정에
들어서는 분들이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