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K...

정순이 2008. 5. 23. 11:24

 

마중 나온 K의 뒤를 따라 골목을 돌고 돌았다. 작은 구멍가게를 지나고 주차장을 지나자 가정집 정원을 개장한 크다란 유흥음식점간판 발광다이오드가 눈을 부시게한다. 유흥음식점을 오른쪽으로하고 골목을 돌아서니 잎 넓은 관목들과 값비싼 정원수가 밀도 짙은 가로등 불빛아래 고즈넉하게 밤을 즐기고 있다.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으려나 생각에 부지런히 눈에 담아두기 위해 연신 주변을 살폈지만, 몇 개의 비슷한 골목이 겹쳐지면서 미로속을 걷는 듯 혼란스러워졌고 그만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내 기억밖으로 밀려나버린다. K의 걸음이 느슨해지자 다 왔나 싶었는데 다시 잰걸음으로 속도를 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앞서가던 K는 내 손을 꼭 잡았다가 놓기도했다. 내 손을 놓았을때엔 K를 놓칠세라 바지런하게 뒤를 따랐다. 어둠을 가르고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 폴드를 열고 통화하는 K ...남편의 전화인 듯했다. 퇴근했나는 K의 말이 들리는걸보니 퇴근해서  아내의 부재가 걱정돼 전화를 건 듯했다. 

 

‘우르르릉 쾅’ 늦은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굵기를 달리하드니 천둥소리를 동반한 번개가 고막을 찢을 듯하다. 작년 문장산 휴게실에서 삼십 여분간 고립되었을때 느꼈던 두려웠던  그때의 기억들이 천둥소리를 들으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철없던 유년시절, 치기어린 행동으로 저질렀던 실수들이 벌값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백성사라도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을까는 유치한 바램도 잠시 스쳤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7.8도의 강진으로 몇 만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중국발 뉴스가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수화기를 들었다. “이 소리 들리제..?"그러게, 그러지않아도 어떡해야하나 생각하고 있다. " "천둥치고 비가 너무 쏟아지는데, 안 가면 안 될까..?” "와라, 나중에 집에 갈때는 내가 바래다줄게..." 20분 거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심리적 거리감은 더 멀게 느껴진다. 늦은 점심 후  따뜻한 바닥에 앉아있으니 연신 눈꺼풀이 졸음의 질량에 꺾이고 만다.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 안폰에서 울려대는 멜로디가 청각을 간지럽힌다.  낯선 번호다. 받을까말까를 잠시고민하다가 통화버턴을 눌렀다. "정순아..." 반가운 목소리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안부를 궁금해하는 K다. "니 진짜 놀러 함 안 올끼가?" "오늘 갈까?" "갈까 하지말고 와라." 사뭇 명령조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늘 언제 한번 만나자, 놀러갈께..약속아닌 약속을 하고선 한 번도 지키지 않았으니...변명할 여지도 없다. 딱부러지게 간다는 약속은 하지않았어도 K는 올꺼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거듭 전화를 해왔다.

 

고향친구라는 보통명사만 들어도 고향에 대한 향수와 소아적 시절에 멈춰있던 추억의 감정이 안개 피어나듯 한다.  정말 세상물정 모르던 나는 K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했다. 수동적이였던 내 성격과는 달리 리더십이 좋아 늘 나를 이끌어주곤했던 K....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앞을 보지 못하는 엄마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공부는 뒤로 미루고, 엄마의 눈이 되고 길잡이가 되주는 착한 딸이였다. 그 착함이 학교에 알려졌고, 효행상을 받았다. 마음도 착했지만, 우윳빛같은 피부, 얄팍한 입술과 오똑한 콧날이 주는 이지적외모...엄마를 늘 보살피곤했었지만, 학과공부에도 소홀하지않아 타의 모범이 되곤했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고향을 등지고 엄마를 따라 부산으로 이사를 온 K...20여년의 간극은 있지만, 어릴때의 친함은 다시 채화를 했다. 그 K가 엄마의 뒤를 이어 샤먼이 됐다.

 

법명,明挺(명정)
조계사 소속...  몇 번의 사업 실패로 마음과 몸이 지쳐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어 번 가 본 적이 기억의 전부인 무속인의 집...부적이라도 써붙여 갖고 있기라도하면 크다란 위안이 되는 듯했고, 사업이 잘 되리라는 일말의 기대감도 내재했다.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도 역술인을 찾았고, 가게를 시작할때도 부적을 써와 벽에 붙여두곤했다. 빨간 괘선으로 어지러이 그려진 그림은 볼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일곤 했었다. 어쩌다 부적을 붙여둔 투명 유리테이프가 높은 온도로떨어졌을때 뇌리를 스쳤던  불안감도  내재했다. 귀신을 가까이하면 귀신게 휘둘린다며 좋을게 하나도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냉담하고 성당에 다니질 않지만, 심연 속 자리하고있는 가톨릭 종교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는 남편은 나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10여분이 지났을까, 철제 대문앞에 선 K는  늘 그래왔든 듯 익숙한 손길로 번호를 눌렀다. 육중한 대문이 소음없이 열린다. 주문을 외면 동굴을 가로막고 있던 크다란 바위가 열리는 동화속 이야기처럼...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안방에서 인기척을 했다. "당신이야..?" "잠시만 기다려요. 곧 저녁상 차릴테니..." K가 부엌에서 음식장만을 하는동안 낯선 방안에 발을 들여놓고 숙연한 자세를 취했다. 투명한 비닐파우치에 핑크빛을 한 옷이 걸려있다. 너무 예뻐 자꾸 눈길이 갔다. 다섯 살 정도의 꼬마들이나 입어야 맞을 듯한 작고 앙증맞은 옷이다. 주머니에는 파란색 지폐도 꽂혀있다. 음식준비가 다 끝난 K는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 귀신이 있긴한거야?" 생뚱한 내 물음에 K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TV뉴스로도 나왔는진 모르지만, 부산역 앞에서 어떤 여자가 발가벗은 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한 적이 있었어. 제 정신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봐? 전혀 아니야..귀신이 쓰였기때문이야. 귀신도 그냥 귀신이 아닌  잡귀 말이야..."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K는 다시 말을 잇는다. " 마음먹었던 일이 제대로 풀리지않는더거나, 돌아가신 엄마가 늘 꿈에 나타나 걱정이 되는 사람들은 굿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지. 그럴때는 죽은 혼령을 불러내고 그와 영적교류를 하고 망자를 대신해 말을 해주는 사람을 천왕 이라고 하거든." 신기한 듯 K의 동선을 따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굿을 하고나면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얼마 전에는 금정산 굿당에서 인간문화재로 등록되어있는 김금화라는 분이 멋진 굿판을 벌인적이 있어...그때 천일염을 바닥에 조금 깔아놓고 20관 되는 돼지를 삼지창에 꽂아 세우는데, 세워지는거 있지? 잘 못 꽂으면 삼지창이 다리에 꽂힐 때도 있고, 목 부분에 꽂힐때도 있는데 그래도 꼿꼿하게 세워져있어...믿기지않지? "K의 말은 이어졌지만, 집안 걱정에 마음이 바빴던 나는 연신 시간을 살폈다.

 

 거부할 수 없는 엄마의 DNA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K는 신내림을 받고 이제야 마음의 안식을 찾은 듯 편안한 모습이다. 50년이란 긴 세월의 삶을 살아오면서 짊어졌어야만했을 그녀의 삶의 무게를 다 짐작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밝은 표정에서 이제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편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미립에서 오는 원숙함이 늘 언니처럼 느껴졌던 K .....일찍 부산에 내려와 유선방송사업으로 성공을 한 오빠는 엄마를 모시지않았고, 그 깊은 트라우마로 이웃하고 살면서도 오빠와는 소통을 하지않는다는 착한 K...."이제 조그만 절이나 하나 지어야겠어...엄마가 그토록 소원했었던 절 말이야........"  말끝을 흐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신념에 찬 듯 굳어있다.  K의 꿈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소망하면서...

                  불기 이천오백오십이년 사월 십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