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만들기 (그 마지막, 비스마르크)
청동으로 만들어진 말 위에 올라타 있는 비스마르크 동상을 본적이 있다. 코밑에 수염
독일제국의 창건자 비스마르크는 황제 빌헬름
2세보다 인기가 더 높고, 동상도 더 많이 세워진 인물이었다. 그는 살아서 고대의 헤르만, 중세의 롤랑, 근대초의 프리드리히 대왕에 이어지는
게르만 영웅신화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숭배되었으며, 죽어서는 독일의 수호정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이 다른 무엇보다 독일제국의 수립이ㅏ는
점에서 그의 명성은 이 제국의 평판과 명운을 같이 했으며, 이것이 비스마르크 신화의 특징이었다. 나폴레옹이나 가리발디 등 동시대 다른 인물에
비해 비스마르크가 국민적 영웅으로서 비교적 단명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불운은 나치스 시대에 시작되었다. 집권 초기에는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스마르크를 후계자로 자처했던 히틀러였지만, 총통에 대한 숭배가 본격화하자 비스마르크의 기억은 서서히 퇴조했다.
결정적인 것은 패전과 분단이라는 독일의 독특한 경험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은 나치스의 제3국을 예비한 문제투성이 구조물로 여겨졌고, 비스마르크는 히틀러의 길을 닦을 불길한 선임자가 되었다. 1990년에 독일이 다시 통일되면서 비스마르크 복권의 조짐이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적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유능한 현실 정치가로 인식되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국민국가 형성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시대의 정치적 신화였고, 나치즘의 청산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인들에게는 불편한 기억이었으며, 이제는 다시 통일된 독일의 주춧돌을 놓는 위인으로 비교적 담담하게 기념할 수 있는 역사적 위인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15년에 태어난 후 1898년 마칠 때까지 독일사와 유럽사를 풍미했다.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1815년은 한 시대를
호령했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해였고,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쇠태하고 메테르니히(Metternich)에 의해 조작된
보수반동체제인 빈체제가 시작된 때였다. 1989년에 비스마르크가 세상을 떴을 때는 파쇼다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 세력이 충돌했고, 독일은
함대법(Flottengesetz)을 제정해 자신의 세력을 비유럽 지역으로 확대시키는 제국주의 정책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시기에 그를 둘러싼 역사의 소용돌이는 중단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1851년, 프랑크푸르트 독일연방 대표자 회의장 안,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침묵의 흐름을 깨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36세의 프로이센 외교관이 담배를 꺼내들었다. 회의장에서는 관례상 독일연방 회장인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담배를 필 수 있었다. 프로이센 대표자로 처음 회의에 참석한 사내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사내가 바로 비스마르크이며, 담배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진 장면이다.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스마르크의 대범하고 도전적인 일면을 신화화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의 정계 입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발탁되었고, 의회에서 첫 연설을 하고 난 후 그에게 '철혈재상(Kanzler von Eisen und Blut)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에게 '강인함' 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던 '철혈재상' 이라는 별칭의 기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를 독일의 '수호정신(Schutgeist)'으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비스마르크 사망 10주년
추도회에서부터였다. 1914년 전쟁 발발과 함께 그로투스를 독일병사들, 즉 게르만 전사들을 위한 수'수호정신' 으로 부각시켰고, 1915년 탄생
1백 주년네 즈음해서 파렘크로크(Ludwig Fahrenkrog)는 비스마르크 전신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그는 살아 있다(Er lebt)!"
라는 글을 <탑지기> 별쇄본으로 발간했다. 당시 독일인들의 비스마르크 숭배의식이 얼마나 고양되어 있었는지는 브라우어(Brauer)의
시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지친 몸으로
누워 있을 수 있습니까?
와서 우리를 인도하소서.
한 번 더 오소서, 독일의
독수리여!
당신의 작품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비웃어주소서, 당신은 죽어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을 비웃어주소서.
비스마르크여, 오소서!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소서, 우리에게 작품을 하나 더 만들어주소서.
그 작품을 우리를 양지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들을
축복해주소서.
우리에게 당신은 정신을 주소서.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를 당신의 그림자 안으로 이끌어주소서.
비스마르크여,
오소서!우리가 기다립니다.
그런 비스마르크가 1945년 이후 독일 일반대중들에게 비스마르크는 숭배대상으로서는 이미 잊혀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연합군 지배
아래 있었던 1948년, 역사학자인 마이네케(Meinecke)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스마르크를......기념한다?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 1950년대 경제부흥과 더불어 1965년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비스마르크 탄생 1백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민족영웅으로서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68운동과 더불어 정치,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개혁적 성향이 강화됨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다시 보수주의자이자 히틀러가 등장하는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1971년 독일제국 창건 1백 주년을
맞던 해에는 1871년 통일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지만,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였고, 독일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인이 갖고 있던 제국 창시자에 대한 인상에 대해<데어 슈피겔(Der Spiegel)>에서는 사민당(S
P D )소속 연방회의 의원인 아우그슈타인(Augstein)의 발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로서 비스마르크는
사망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