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띠리리리....”‘엘리제를 위하여‘ 컬러링 멜로디가 울려 수화기 액정화면을 보니 친구의 이름이 뜬다. ‘술 한잔 하자는 전화구나...일 것이라는 생각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친구의 언니가 개업했다는 소식을 들은지가 달포가 지났다. 언제 시간이 나면 같이 한 번 가자고 친구와 약속을 했었는데,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야 '아차' 싶었다. 개업하고 난 후 며칠까지는 부채(負債)가 있는 채무자처럼 기억의 폴드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개업하고 난 며칠까지는 지인들의 출입으로 나의 방문이 방해가 될꺼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용할 때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야, 정순아 언제 시간 함 내서 온천장에 놀러 한 번 와라...”그럴때마다 “그래, 언제 시간 내서 하번 갈게..”
말은 그렇게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늦은 시각까지 가게에 얽메여있다보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핑계를 둘러대곤 했지만, 그럴때마다 그 미안함이 가슴 언저리에 가위눌리곤했다. 나의 반응이 내켜하지않는다는 생각이였는지 아예 내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는 친구....(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가슴 한쪽에서 알싸하게 저려왔다)
그런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으니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컴앞에 앉아있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00가 만나자는 전화가 왔는데요?" 늘 집과 가게를 오가다보니 외출을 할때마다 늘 신경이 곤두서곤한다. 아니나다를까 친구는 "정순아, 129번 타고 서면 롯데백화점앞에서 내려서 전화를 해. 알았지?"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맞추기위해 일찌감치 퇴근길을 서둘렀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장롱문을 열고 옷속을 뒤적여봐도 마땅히 입고 갈 옷이 없다. 외출을 않으니 그럴수밖에....친구언니와의 만남은 실로 몇 십년 만이다. 언제든가 기억을 소급해올라가보면 식물원에 잠시 놀러갔다오다 길에서 친구언니를 만나게 됐고, 들어가서 차 한잔을 마신적이 있었다.
일찌감치 부산으로 내려와 정주해서인지 인테리어가 잘 된 곳에서 살고 있었다. 청순했던 언니의 모습은 몇 년의 물리적 풍화작용을 거쳐 아주 도회적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자연히 내 자신의 입성에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그 언니와의 만났던 기억의 전부다.
한낮의 폭염으로 건물들에 스며들어있던 복사열은 해가 기운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열기는 식지않았다. 조금 전 샤워를 했는데도 얼굴 곳곳에서 땀이 보송보송난다. 보행신호로 바뀌길 기다리고 서 있는 시야 앞으로 129번 버스 한대가 지나간다. 그 번호의 버스는 배차시간이 꽤 길어 조금 더 서두르지못했던 나자신을 책망하기까지했다.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에 정류소에서 타고가야할 버스를 기다린다는것과 외출시간이 항상 타이트한 내겐 초조함과 불안감이 초래하곤한다. 환승을 할까는 생각이 들다가도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와 지하철 환승제도 도입으로 버스 노선이 많이 바�다. 내가 알고 있는 노선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에 환승했다가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서이다.
5분여를 기다리니 129-1 번호가 미끄러지듯 시야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가볍게 뛰어올랐다. 버스안은 틀어놓은 냉방기로 시원하다. 칸막이 하나 사이로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듯하다. 4차선 도로지만, 곳곳에 지하철 공사로 병목현상이 재연되곤해 친구와 만나 이야기 나눌 시간이 그만큼 짧아진다.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50분이나 걸렸다.
같은 부산에서도 도로정체로 이러니 명절에 귀성객과 귀향객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했다. 나처럼 시간이 타이트하지않고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람들은 시원한 버스내에서 휴대문화를 즐긴다. 문자메시지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자동차 소음으로 혹시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였는지 폴드를 열어보고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50여 분을 달리자 친구가 아르켜 준 정류소가 버스안내여성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친구가 기다릴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 폴드를 열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헉, 그런데 친구가 아르켜준 번호를 눌렀는데도 '뚜뚜뚜뚜...' 소리만 계속 났다. 단절의 두려움...막막하다. 그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무심함이 이런 결과를 빚었나는 생각, 낮에 통화할 때 번호를 잘 못 가르켜줬나? 바로 확인하지 못했던 나의 서투름....별별 생각이 다 났다. 혹시 잘 못 아르켜줬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전화를 했고, 다행히 전화번호부공책에 친구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버튼을 누르니 친구의 음성이 전파를 타고 들려왔다. 좀 전의 막막함이 반가운 마음에 묻히고만다.
친구와의 만남을 기다리길 1분여,친구가 나올것 같은 길목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멀지않은 곳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시야안으로 들어온 친구는 두팔을 벌리며 오라고 손짓을 한다. 라임색 티셔츠에 하얀 백바지, 한 가닥으로 포니테일로 고정하고 늘어뜨려진 머리는 곱게 땋아 끝을 살짝 고무벤드로 묶었다. 작년 TV에 출연한다며 잠시 가게에 들렸던때보다 더 세련된 모습이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니 두꺼운 유리벽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유리문을 힘들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후 친구가 언니를 불렀다. 카운터에서 일을 보고 있던 언니의 친구가 반색을 한다. "이게 몇 십년 만이야, 전혀 기억나지 않아.." 친구의 언니는 30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두번째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내려온 모양이다. 벽돌색 V넥라인의 원피스, 하얀 목에 걸려있는 두꺼운 목걸이, 하트모양 팬던트, 검지 손가락에 끼여져 있는 선굵은 반지, 뒷목덜미 위 머리에 볼륨을 넣은 세련된 단발머리가 서울의 냄새를 진하게 풍겨왔다. 어렵게 성사된 친구와의 데이트는 두어시간밖에 가지지 못했고, 늘 바쁜 친구는 다른 약속이 있어 아쉬운 피날레를 장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