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여 전 전회장으로부터 가벼운 언급이 있었다. 이번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남편을 추대할 것이라고...임기가 2년인 회장직은 회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총무를 지명해야한다. 대체로 총무직은 꺼려하기 때문에 회장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회장은 이름만 등재시켜놓고고 잡다한 일을 하지않아도 되는 명예직이지만, 총무는 조직의 제반적인 살림살이를 맡아야하니 심적 부담도 柱礎하고 있다는 생각도 무시할 수 없다. 임기가 끝난 후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남기게되면 원망도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인프라되어있을터이다. 또 노력에 따른 인센티브도 전혀 없으니 당위적이지 않을까.
몇 년 전 남편도 그랬었다. 한 번 더 총무를 맡으라는 임원들의 요구에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남편이 거절한 자리에 두 번이나 연임했던 사람이 세 번째도 맡았으니 그 분의 고운 심성은 미루어짐작할 수 있으리라. 타고난 친화력과 여러 회원들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성정의 사람이였다.
회원 전원이 돌아가면서 순차적으로 한 번씩은 거쳐야할 통과의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총무되는건 거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총무직을 거쳐야지만 회장의 직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지않겠는가.
회장과 이웃하고 있어 거절하기 어렵거나 회장과 친밀한 관계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껄끄러운(?) 자리다. 그러니 총무로 지목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을 염두에 둬야한다.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의견을 물어왔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 모임에 새로 들어온 이웃이 맡았으면했다. 무엇보다 회장보다 나이가 작아 자존심의 부담도 해소할 수 있고, 같은 블럭에 살고 있어 회장과 의견 나누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회장을 맡아도 될 연배이긴 하지만, 한 번도 총무직을 맡은적이 없으니 총무직을 거치지않고 회장으로 추대하긴 모양새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편의 복안에 일순 수긍이 갔다. 그렇지만 남편보다 많은 연배라 총무직을 수용할 수 있겠나는 일말의 의구심이 일기도했다. 내 생각과 공유를 한 전 회장도 남편말에 호응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총무직을 받아들이지않고 거부를 하면 남편도 회장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 총무직을 맡게끔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디테일한 주문도 있었다.
. 모임 시각에 맞춰 가게를 나섰다. 기축년, 소의 상징인 느릿함은 2009년을 보내기 아쉬운 듯 한 밤의 기온은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한해를 결산하는 12월의 식당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육중한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회식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동선을 따라 시선을 돌려봐도 회원들의 얼굴은 좀체로 앵글에 잡히지않는다. 고개를 들고 더 깊은 곳으로 시선을 멀리하니 그제서야 낯익은 몇몇 사람이 한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다. 두르고 온 머플러를 풀고 자리에 앉으니 실내의 따뜻한 훈기로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다.
회원들은 위장을 채우기위해 바지런한 젓가락질이 오갔지만, A4용지를 들고있는 회장님은 2009년도 결산보고를 하기 바쁘다. 그리고 회장으로 추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추대하라고했다. 누구의 이름이 호명될지의 긴장된 침묵을 가르고 남편 이름을 호명했고, 이어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2년전에는 회장으로 두 사람이 물망에 올라 표결로 승부를 갈랐지만, 이번에는 그렇지않았다. 일찌감치 자신의 이름이 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말에 윤색도 할 줄 모르고, 감정에 충실하다. 사교의 술수나 화술의 능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편이 일어서드니 "앞으로 잘해보겠다."는 짤막한 말로 수락인사를 대신 했다. 총무로 누굴 지목했으면 좋겠나는 회장님의 말에 지난 번 생각해뒀던 사람을 지목했다. 그렇지만 너무나 완강하고 결연하게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이웃을 지목하니 반색으로 응답해왔다. " 이 모임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 어떠한 환경인지 파악 할 수가 없으니 회원들이 지적이나 어드바이스를 해주면 머슴처럼 잘 하겠다."는 말로 총무직을 수용했다.
이제 2년의 임기동안 방대해진 조직을 이끌어가야하는데, 걱정부터 앞서는건 남편의 성격이나 내 성격으로는 지난 회장만큼 잘 이끌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고민에 현기증이 인다.